<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책세상·1만4000원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책세상·1만4000원
위대한 철학자들이 걷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낯선 얘기가 아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흔히 “우물에 빠진 철학자”로 유명하다. 별을 보며 걷다 우물에 빠져 하녀의 비웃음을 샀다는 이 일화를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소개하면서 “모든 철학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썼다. 비록 ‘한 치 앞을 못 보는’ 이에 대한 비아냥으로 후대에 남긴 했지만, 되새겨보면 이전부터 ‘걷기’와 ‘사유’가 나뉘지 않았다는 얘기다.
걷고 사색하며 얻은 통찰력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 낸 철학자와 작가들은 많다. 매일 오후 5시에 산책을 나섰다는 칸트의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니체는 알프스를 걸으며 ‘영원회귀’를 떠올렸고, 루소는 “전원(田園)은 나의 사무실”이라고 고백했다. 천재 시인 랭보는 ‘바람 구두를 신은 인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프랑스 파리12대학 철학 교수인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걷는다는 것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걸으면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재발견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걷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 걷기는 가진 것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오히려 오래 걸으려면 배낭을 덜어내야 한다. “비결도 없고, 준비해야 할 것도 없다. 그냥 거기 있기만 하면 된다.”
걷기는 전복적이다. 어리석은 관습으로부터, 권태와 소유로부터, 변화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떠나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반항적이고 근원적인 부분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학생들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길을 떠나도록 만든 잭 케루악,“너무 많은 돈/너무 많은 가난”을 노래했던 생태시인 앨런 긴즈버그까지, 전후 비트 철학이 젊은이들을 길로 떠민 것도 일맥상통한다.
매일 등굣길 혹은 출퇴근길 같은 일상도, 잠깐의 산책 혹은 며칠간의 여행도,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 행진’ 같은 정치적인 행위도 ‘걷기’다. 걸으려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세상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걸으라’가 아니라, ‘행동하며 살라’고 권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때문일까. 가장 와닿았던 것은 ‘우울을 넘어서는 걷기’였다. “누워 있으면, ‘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난 그냥 잠도 자지 않고 여기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할 뿐 아무것도 안 해’라는 생각이 반드시 들게 되기 때문이다. (…) 숨을 쉬듯 그렇게 걸을 뿐이다. 살아 있다고 느끼기 위해 그렇게 걷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서 걷는 것이다.” 슬픔의 우물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숨 쉬듯이 걷는다. 함께 걸어간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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