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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조선이 후금을 쳤다 대패한 ‘심하 전투’

등록 2014-09-21 22:49

포로가 됐다 풀려난 문인의 일기
‘조천일기’는 조공사절단 동행기
책중일록
이민환 지음, 중세사료강독회 옮김
서해문집·1만1900원

조천일기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서해문집·1만1900원

조선이 누르하치의 후금을 선제공격했다가 대패한 이른바 ‘심하(深河) 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해군 11년인 1619년 2월,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1만3000명의 군사를 보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공격했으나, 그해 3월4일 허투알라 근처를 흐르는 심하의 부차(富車) 들판에서 후금의 기습을 받아 7000여명이 죽고 4000여명이 항복해 포로가 됐다.

<책중일록>은 심하전투 당시, 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출병했던 문인 이민환이 남긴 전쟁일기이자 포로수기다. 책은 1618년 4월 누르하치가 무순(撫順)을 함락한 때로부터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가 강화 협상의 성공으로 1620년 7월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만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건주(建州)여진의 작은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1559~1626)는 1583년 처음 군사를 일으켜 1616년(광해군 8년) 해서여진까지 병합해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한 상태였다.

무순은 심양에서 동쪽으로 45㎞ 떨어진 최전방 국경도시여서 명나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요동 경략(총사령관) 양호의 지휘 아래 후금을 치러 나서면서 조선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처지여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강성해지는 후금과 쇠약해지는 명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펴고자 했던 광해군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원군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는 군대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진격했으나 누르하치는 명의 주력군인 서로군에 집중해 먼저 격파한 뒤 차례로 나머지를 무찔렀다. 지은이 이민환은, 군량이 지급되지 않아 사나흘씩 굶으며 행군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 군량을 기다리기 위해 행군을 늦추려 했으나 명나라 제독 유정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 정보에 어두워 후금의 승전보를 아군의 도착 포성으로 잘못 알아들었다가 기습을 면치 못하는 어리석음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지은이 등이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의 실리외교 덕분이었다. 누르하치는 여러번 조선에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어 명나라에 대항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사신도 보내지 않고 회신도 하지 않았다. 두 강대국에 낀 약소국의 남루한 처지였다. 두달 만에 광해군은 “후금의 국서에 회답하려 하지만, 명나라 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기 때문에 국서를 보내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댄 뒤, “두 나라는 전부터 원수진 것이 없으니 서로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 근래 조선에 투항해온 여진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돌려보낸다”는 구두 전갈을 보냈다. 누르하치는 크게 기뻐하며 이민환을 포함해 10명을 돌려보냈다.

1619년 심하 전투 당시 명군과 조선군의 행군 경로(왼쪽)
1619년 심하 전투 당시 명군과 조선군의 행군 경로(왼쪽)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숭명배금주의자들이 득세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것은 잘 아는 바와 같다. 책 뒷부분에는 이민환이 따로 지은 <건주문견록>을 실었는데, 누르하치와 그 가족, 부하들의 용모와 행태, 성격을 비롯해 후금의 자연과 문물 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관찰기다. 패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 조련과 변방 대책에 대해 쓴 <월강후추록> 등 부록도 귀한 자료다.

조헌의 <조천일기>는 1574년 베이징으로 가는 조공 사절단에 질정관으로 동행한 기록이다. 책 제목의 ‘조천’(朝天)은 ‘황제를 배알하다’는 뜻이다. 질정관은 불명확한 한자의 뜻과 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국 현지의 학문 경향과 정치 현실을 살피는 자리였다.

조헌의 눈에 비친 명나라 변방의 관리들은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파렴치한들이었다. 특히 요동의 도지휘사 진언(陳言) 등은 원하는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사사건건 꾸짖고 욕을 했다. 조헌은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적었다. 현지 백성들이라고 편안할 리가 없었다. 한 일꾼에게 “순천 부윤이 돈을 요구합니까?”라고 물으니 “지금 관원이 된 자 중에 돈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올 정도였다.

후금의 초기 도성인 허투알라 성. 서해문집 제공
후금의 초기 도성인 허투알라 성. 서해문집 제공
조헌은 이렇게 혀를 찼다. “다행히 변경에 근심이 적은 것은 다만 오랑캐 가운데 웅대한 계략을 가진 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임금이 된 자가 어찌 저들에게 호걸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방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며 “우리 동방의 평안도와 함경도 등의 지역은 방비가 이(명나라)에 미치지 못하고 군민을 약탈하는 놈들은 도적 같은 오랑캐뿐이 아니다. (…) 묘당에서 정사하는 자가 깊게 생각해 미리 방어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적었다. 이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누르하치가 “웅대한 계략”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니 조헌의 예지력은 가히 미래를 꿰뚫는 것이었다.

조헌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 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전사했다. 조헌이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이 흘러, 그의 제자 안방준이 스승의 글을 엮어 ‘조선에 돌아와 주상께 올리는 글’이라는 뜻의 <동환봉사>라는 책을 펴냈다. 명나라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조헌과 이민환의 시대를 앞선 조언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임진왜란과 두차례의 호란으로 이어졌다. 무릇 충신의 고언을 귓등으로 흘리는 위정자는 스스로 불행을 면할 수 없고, 백성까지 도탄에 빠지게 하는 법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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