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연작장편 <신기생뎐>
군산의 기방 ‘부용각’도 기생 오마담·부엌어멈 타박네도 세월의 뒷전으로 스러져간다
“모든걸 바쳐 사랑했기 때문에 난 원도 한도 없소”
“폭폭한 이 생을 내 것 아닌양 살짝 부려놓을수 있다면”
“모든걸 바쳐 사랑했기 때문에 난 원도 한도 없소”
“폭폭한 이 생을 내 것 아닌양 살짝 부려놓을수 있다면”
소설가 이현수(46)씨가 연작장편 <신기생뎐>(문학동네)을 펴냈다. 군산의 기방 ‘부용각’을 무대 삼아 기생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7편의 연작에 담았다.
‘전(傳)’의 예스러운 표기인 ‘뎐'을 부러 살려 쓴 데에서 소설의 정조와 지향을 엿볼 수 있다. 지난 역사의 어엿한 일부였으나 어느덧 소멸의 길을 밟고 있는 기방과 기생들의 존재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연작의 바탕에 깔려 있음이다.
일곱 연작에 각각의 주인공이 있지만,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진짜 주인공이라면 첫 두 연작 <부엌어멈>과 <오마담>의 제목으로 부각된 ‘타박네’와 오마담을 들 수 있다. 소리를 주 전공으로 삼는 소리기생인 오마담과 음식 장만을 총괄하는 부엌어멈 타박네는 근 반세기 전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 출중한 소리와 음식 솜씨 덕에 한 시절을 풍미해 온 두 사람은 지금은 각각 환갑 즈음과 여든 가까운 고령으로 젊은 기생들을 거느린 채 이 시대의 마지막 기방일지도 모를 부용각을 건사하고 있다.
사내들의 의리를 뺨칠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에게 의지해 온 두 사람이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이해도 양보도 할 줄 모른다. 바로 오마담의 ‘헤픈 사랑’이 문제다. 타박네가 보기에 오마담은 지나치게 무르고 정이 많은 반면 사람 보는 눈은 없어서 사내들에게 속기 일쑤다. 몸과 마음과 돈까지 몽땅 빼앗기고 나서도 사내를 원망할 줄 모르는 오마담이 타박네의 눈에는 여간 어리숙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게 아니다. 물론 오마담 당자의 생각은 다르다.
“성, 나는 그 양반들 원망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소. 나는 그들 모두를 첫정처럼 똑같이 사랑했거든.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걸 바쳐서 사랑했기 때문에 난 원도 한도 없소.”(36~7쪽)
“밥 없이는 살아도 사랑 없인 못 사”(37쪽)노라 뻗대는 오마담에게 갖은 싫은소리를 아끼지 않는 타박네(누구에게든 타박을 잘 준다고 해서 붙은 별명)지만, <부엌어멈>의 마지막 장면은 타박네의 독백 형식을 빌려 잔잔한 반전을 마련해 놓고 있다. 작가의 웅숭깊은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 말솜씨 깊은 시선 돋보여
“오마담, 아니 연분아. 나도 너처럼 무언가에 환장을 해보고 싶다. 환장한 순간만은 구름에 발을 디딘 듯 물살에 몸이 실린 듯 그리 살아지는 게 아니더냐. 잠시라도 그 무게를 잊는 것이 아니겠느냐. 폭폭한 이 생을 단 일 초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양 아무도 모르게 땅바닥에 살짝 부려놓을 수만 있다면.”(40쪽)
연작의 두 번째 작품인 <오마담>에서는 오마담의 동기(童妓)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채련’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오마담이 소리기생이었던 데 비해 춤기생이었던 채련은 어느 날 단소 하나를 달랑 든 채 기방에 들어선 사내와 사랑에 빠진 끝에 종내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비록 비극으로 마감되긴 했지만 채련의 사랑에 공감하는 오마담과, 그 사랑이 못마땅하고 채련이 아깝기만 한 타박네는 단소잡이 사내의 외양과 됨됨이를 두고도 상반되는 품평을 내놓는데, 이러하다.
“팔척장신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사내였네라.”/“딱, 소도적겉이 생긴 놈이라. 좋게 봐줘야 지리산 땅꾼이나 낙동강 뱃사공쯤 될라나.”/“말수 적고 속 깊었지.”/“응큼하게 생긴 낯짝에 속에는 구렁이가 열 마리도 넘게 들어앉은 놈이었제.”/“성격 털털하고, 행동은 시원시원했었다.”/“추저버도 추저버도 그래 추저분한 놈은 조선천지 다시 없을 끼다. 간 맞추니라꼬 천한 티꺼정 줄줄 안 흘렀나.”(47쪽)
탁구로 치자면 공격 전형과 수비 전형이 맞선 듯한 형국인데, 말을 다루는 작가의 능란한 솜씨가 빛난다. 그런가 하면 단소잡이의 연주에 맞추어 채련이 살풀이 춤을 추는 장면을 묘사한 만연체의 문장은 완연 다른 분위기로 작가의 내공을 드러낸다.
“넘실거리는 춤사위에 자신을 내맡긴 채 태산과 같은 장중함으로 소슬바람을 치마 가득 품고 지그시 돌아설 제, 이제 막 한창인 연보랏빛 들국화가 채련의 어깨 위로 흐드러지고 그녀의 발 아래로는 못다 진 희디흰 연꽃 숭어리 소리도 없이 이울었다.”(48쪽)
사랑과 운명의 미묘한 엇박자
소설 속에서, 그리고 부용각에서 타박네와 오마담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젊은 기생 ‘미스 민’이다. 본명이 나끝순인 미스 민은 예전의 채련을 빼닮은 춤기생으로, 기방의 오랜 전통에 따라 화초머리를 올리게 된다. 예전의 채련이 화초머리를 얹기로 된 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반면, 신세대 기생 미스 민은 명색 애인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머리를 얹는다. 오마담은 미스 민을 향해 “어쩌면 네가 이 시대 마지막 기생이 될지도 모르겠고나”(94쪽) 한숨 지으며 말하고, 미스 민 자신 기방의 소멸 가능성을 말하는 사내에게 “누군가 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겠지요”(102쪽) 당당하게 대꾸함으로써 자신이 그 ‘마지막 기생’이 되겠노라는 의지를 밝힌다.
오마담에게 빌붙어 살며 그의 재산을 알겨먹을 기회를 노리는 기둥서방 ‘김사장’과 오마담을 향한 연정을 감춘 채 20년 동안 묵묵히 부용각의 집사 노릇을 하고 있는 ‘박기사’의 대조적인 모습도 부용각을 구성하는 풍경의 엄연한 일부다. 박기사를 향한 오마담의 독백은 사랑과 운명의 미묘한 엇박자에 관한 호소력 있는 증언이라 할 만하다.
“박기사, 당신에겐 정말 뭐라 할말이 없소. 당신의 마음이 하는 말을 내 마음이 몰랐다 생각지는 마오. 그러니 너무 헛헛해 말아요. 천지간의 사내란 사내는 모두 품을 수 있으나 당신에게만은 그리 하지 못하는 걸 난들 어떡하오. 그런 삶도 있으려니, 그런 사랑도 있으려니 하면 그뿐. 도덕이나 규범도 규정짓기 나름이고 사랑도 규정하기 나름 아니겠소.”(236쪽)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오마담이 아니라 박색에다 몸매도 보잘것없는 타박네에게 숨겨둔 아들이 있었다는 결말의 ‘깜짝 반전’ 역시 독자로 하여금 세상사의 복합적이고 신비한 이치에 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작가는 “근현대 여성들은 기생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며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진짜 기생 얘기를 완성해서 기쁘다”고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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