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마틴 루서 킹 목사, 버락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 이들은 청중이 듣기 원하는 ‘적절한 몇마디’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명연사들이다. 청어람미디어 제공
플라톤이 수사학 싫어한 이유는 뭘까
수사학 잘 알면 민주주의가 세진다
수사학 잘 알면 민주주의가 세진다
샘 리스 지음, 정미나 옮김
청어람미디어·1만5000원 훌륭한 연설은 청중을 마법처럼 빨아들인다. 연설의 어떤 요소가 사람들을 끌어올리고 움직이게 하는 걸까.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샘 리스의 <레토릭>은 그 마법의 비밀을 해체해 먹기좋게 요리한 책이다. 단순한 실용서는 아니다. 그리스 아테네와 로마에서 비롯한 레토릭의 역사와 구성요소, 좋은예와 나쁜예를 훑는 일은 서양 지성사를 관통하는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이 책은 자신만만한 ‘레토릭’으로 독자를 설득하겠다고 달려드는, ‘레토릭’에 관한 흥미로운 교양서이자 실용서다. 우리말로 수사법 또는 수사학으로 번역하는 ‘레토릭’은 말을 꾸미는 기법이다. 수사학을 싫어했던 플라톤 이래 레토릭은 “비현실적이고 신뢰할 수 없으며 쓸데없이 화려한 것의 전형으로” 공격받아 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지은이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실제로 우리는 평범한 대화에서도 수사를 사용한다. “나는 지금 왜 혼자 떠들고 있는가?”라는 수사 의문문은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군”이라는 말에 수사적 기교를 넣은 표현이다. 말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은 수사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수사를 설명하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수사는 학문도, 연설가의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보험사와의 언쟁 속에, 레스토랑에서 창가 자리를 부탁하는 말 속에,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를 어르는 말 속에 들어 있다. (…) 수사를 잘 안다는 것은, 한 시민으로서 힘을 행사하는 동시에 힘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을 가리는 것도, 거짓을 벗겨내는 것도 모두 수사를 통해서다.” 지은이는 수사학의 역사를 간략히 훑은 뒤, 키케로를 추종했던 쿠인틸리아누스의 분류를 빌려, 레토릭의 비밀 5가지를 ‘발견(invention), 배치(arrangement), 표현(style), 기억(memory), 연기(delivery)’로 정리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 부분에서 설명한 에토스, 로고스, 파토스 삼총사다. “에토스란 성실성을 기반으로 청중과 관계를 확립하는 방식이다. 로고스는 청중의 마음을 이성으로 움직이는 방식이다. (…) 파토스는 청중에게 분노, 동정, 두려움, 환희 등의 감정을 북돋우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서 에토스는 말(글)의 도입부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말을 하는 자신의 자격을 청중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대감을 쌓는 일이다. 저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이 대표적인 예다. 청중을 띄워주고 자신을 낮추면서 호감을 얻는 전략이다. 여기서 핵심은 “청중을 파악하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 어떤 관심과 편견을 갖고 있는지, 성별이나 연령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로고스(이해시키기)와 파토스(마음 움직이기)는 이해하기 쉬우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책은 중간중간 설득의 고수들을 소개한다. 존 밀턴의 <실낙원>과 영화 <일곱가지 유혹>에 등장하는 사탄,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 처칠과 히틀러, 링컨과 마틴 루터 킹,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대표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파토스를 자극하고, 영리하게 로고스를 구사하여, 불확실하고 잠정적인 승리에 그쳤던 게티즈버그 전투를, 미국 자유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순간으로 승화”시킨 경우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은 “연설가와 청중이 발신자와 수신자 관계가 아니라, 함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발신자가 되는 (…) 에토스적 호소의 궁극”을 보여준다. 그가 “100년이 지난 후에도/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일부러 중간에 한번 쉬는 것은 청중들의 ‘아멘’을 이끌어내려 일부러 말을 끊는 ‘돈절법’이라는 수사법이다. 설득의 고수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지은이는 2009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지만 허세처럼 느껴지지 않는 그의 화법이 궁금해졌다”며 이 책을 쓴 이유도 오바마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는 아웃사이더였던 오바마가 “2명의 위대한 전통, 에이브러햄 링컨과 마틴 루터 킹에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오바마가 즐겨쓰는 행두반복이나 ‘~의 ~의 ~의’로 구성하는 연사첩용은 각각 킹과 링컨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오바마는 노예해방자로서의 이미지까지 빌려와 에토스적으로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요즘 SNS에서 오바마 동영상이 퍼지고 있다. 한 청중이 연설을 방해하자 이를 제지하려던 경호원을 오바마가 말리는 장면이다. 대통령이 제대로된 기자회견 한번 하지 않는 정치 후진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부러움을 넘어 부끄러운 장면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수사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례없는 민주주의 덕분이었다. 권력이 민회로 넘어가면서 설득력 있는 연설이 중요해진 탓이다. 플라톤이 수사학을 신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우리나라 대통령은 어떨까.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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