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박해천 지음/워크룸프레스·1만5000원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은 주택 200만가구 건설과 수도권 신도시 개발 정책을 내놨다. 흥미로운 것은 신도시 아파트가 “소매가 아닌 도매의 방식으로 도시를 바꾸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존 아파트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서울 신시가지 아파트가 예비 중산층을 수요자로 삼아 포드주의적 골격 위에 세워졌다면, 90년대 신도시 아파트는 그 골격 위에 케인스주의적 외피를 덧씌운 채로 미래의 ‘보통 사람들’을 맞이했다.” 곧 “주택 공급이라는 목표뿐 아니라 집 장만에 성공한 보통 사람들의 구매력을 동력원으로 삼는 경기 활성화의 새로운 용광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수도권 신도시에는 대형 할인점이라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고, 사람들은 ‘소비자-고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에 눈을 떴다. 얼핏 기존의 위계가 사라진 듯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적극적인 사교육 소비의 주체가 되어 자식들에게 ‘보통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는 학력자본을 만들어주기 위해 발버둥친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씨는 새 책 <아수라장의 모더니티>에서 90년대의 ‘아수라장’을 이렇게 풀이한다. 지은이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같은 전작을 통해, 수많은 자료(팩트)를 근거로 가상의 상황(픽션)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왔다. 지은이는 이런 작업을 ‘비평적 픽션’이라 부르는데, 연작의 마지막인 이번 책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인공물들과 중산층 문화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맞물려 제시한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60년대 서북계-이층양옥-중상류층, 80년대 강남-아파트-중산층, 90년대 신도시-이마트-중산층으로 나뉠 수 있는 세 집단에 주목했다. 60년대 서구식 이층양옥은 당시의 ‘현대적 문화생활’을 상징하는 인공물이다. 한국전쟁 뒤 남쪽에 남아 ‘중상류층’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이북 출신(서북계)의 엘리트들이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 이런 주거 형태를 축으로 삼아 삶을 구축해갔다. 지은이는 이에 대해 “종교와 국가의 호위 아래 완벽한 가족의 형상을 보호하는 요새이자, 서울 구도심의 특정 지점을 초점으로 삼아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이동하다가 지표면에 안착한 인공위성”이라고 풀이한다. 지은이는 시대의 편린들을 담담한 이야기로 풀어서 펼쳐놓지만, 책 제목에도 나타나듯 그것은 실상 ‘아수라장’이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현대의 다양한 인공물들이 인간이 영위하는 일상의 질서를 바꾸고 인간의 인지 구조와 욕망까지 좌우하는 대목에 집중하는데, 그 흐름은 비참함이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기만 하다. 예컨대 박정희가 약속했던 산업화 시대의 ‘내일’은 중산층이 되기 위해 발버둥친 사람들에게 ‘내 집 마련’에 이어 ‘자가용 마련’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아파트가 집 안에서 욕망의 허기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교육시켰던 반면, 자동차는 집 바깥에서 욕망의 방향과 속도를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려줬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박해천 지음/워크룸프레스·1만5000원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은 주택 200만가구 건설과 수도권 신도시 개발 정책을 내놨다. 흥미로운 것은 신도시 아파트가 “소매가 아닌 도매의 방식으로 도시를 바꾸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존 아파트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서울 신시가지 아파트가 예비 중산층을 수요자로 삼아 포드주의적 골격 위에 세워졌다면, 90년대 신도시 아파트는 그 골격 위에 케인스주의적 외피를 덧씌운 채로 미래의 ‘보통 사람들’을 맞이했다.” 곧 “주택 공급이라는 목표뿐 아니라 집 장만에 성공한 보통 사람들의 구매력을 동력원으로 삼는 경기 활성화의 새로운 용광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수도권 신도시에는 대형 할인점이라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고, 사람들은 ‘소비자-고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에 눈을 떴다. 얼핏 기존의 위계가 사라진 듯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적극적인 사교육 소비의 주체가 되어 자식들에게 ‘보통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는 학력자본을 만들어주기 위해 발버둥친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씨는 새 책 <아수라장의 모더니티>에서 90년대의 ‘아수라장’을 이렇게 풀이한다. 지은이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같은 전작을 통해, 수많은 자료(팩트)를 근거로 가상의 상황(픽션)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왔다. 지은이는 이런 작업을 ‘비평적 픽션’이라 부르는데, 연작의 마지막인 이번 책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인공물들과 중산층 문화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맞물려 제시한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60년대 서북계-이층양옥-중상류층, 80년대 강남-아파트-중산층, 90년대 신도시-이마트-중산층으로 나뉠 수 있는 세 집단에 주목했다. 60년대 서구식 이층양옥은 당시의 ‘현대적 문화생활’을 상징하는 인공물이다. 한국전쟁 뒤 남쪽에 남아 ‘중상류층’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이북 출신(서북계)의 엘리트들이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 이런 주거 형태를 축으로 삼아 삶을 구축해갔다. 지은이는 이에 대해 “종교와 국가의 호위 아래 완벽한 가족의 형상을 보호하는 요새이자, 서울 구도심의 특정 지점을 초점으로 삼아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이동하다가 지표면에 안착한 인공위성”이라고 풀이한다. 지은이는 시대의 편린들을 담담한 이야기로 풀어서 펼쳐놓지만, 책 제목에도 나타나듯 그것은 실상 ‘아수라장’이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현대의 다양한 인공물들이 인간이 영위하는 일상의 질서를 바꾸고 인간의 인지 구조와 욕망까지 좌우하는 대목에 집중하는데, 그 흐름은 비참함이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기만 하다. 예컨대 박정희가 약속했던 산업화 시대의 ‘내일’은 중산층이 되기 위해 발버둥친 사람들에게 ‘내 집 마련’에 이어 ‘자가용 마련’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아파트가 집 안에서 욕망의 허기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교육시켰던 반면, 자동차는 집 바깥에서 욕망의 방향과 속도를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알려줬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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