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폭탄 만들기
리처드 로즈 지음, 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5만원 핵무기를 개발하는 미국의 ‘맨허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실험 물리학자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는 B-29 폭격기에 올라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파괴력을 직접 측정했다. 그는 당시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작전에 참가한 것이 무척 후회스럽다”고 하는 한편, “(가공할 위력의 폭탄으로 전쟁이 억제될 수 있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다”고 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또 이를 정당화해온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앨버레즈의 말처럼 2발의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그것은 새로운 핵무기 개발 경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원자폭탄 만들기>(1986)로 원자폭탄 개발의 역사를 다뤘던 저술가 리처드 로즈는 후속작인 <수소폭탄 만들기>(1995)를 통해 여태까지 인류가 개발한 가장 파괴적인 무기인 수소폭탄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000여건의 문헌과 관련 인사들의 육성 증언을 끌어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지은이는 이런 형식에 대해 ‘베리티’라는 이름을 붙인다. ‘진실을 진술한 것’이란 뜻 정도로 파악된다. 종전 이전부터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인지했던 소련은 스탈린의 오른팔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앞세워 핵무기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맨허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클라우스 푹스로부터 받은 정보가 주된 뼈대가 되어, 마침내 소련은 1949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 트루먼 정부는 1950년 에드워드 텔러의 열핵무기 연구에 근거에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천명했다. “국제 협상의 정치 지렛대로 말고는 사용할 의도가 없으면서도 위협적인 핵무기를 계속 유지 확대하는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급기야 미국은 1952년 히로시마를 파괴한 원자폭탄 ‘리틀보이’보다 출력이 1000배 강한 최초의 수소폭탄 ‘아이비 마이크’의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그 뒤 대규모 군비 경쟁과 국제 사회의 위협은 날로 증가했고, 1960년대 벌어진 미국과 소련 사이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그 정점이었다. 지은이는 어리석은 군비 경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핵 억지력’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에 눈길을 준다. 지은이는 “군비 경쟁은 소통과 학습의 과정”이었다며, “(핵무기의 문제는) 결국 인류가 전쟁과 다툼 없이 자제하면서 처신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9개의 원자폭탄을 괌으로 보내 한반도 또는 중국을 공격할 상황에 대비했다거나, 한국전쟁 종전 뒤 이승만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찾아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싶다”며 전쟁을 부추겼다가 그러면 “민주주의는 망하고 문명은 파괴될 것”이라는 핀잔을 받았다는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흥미롭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리처드 로즈 지음, 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5만원 핵무기를 개발하는 미국의 ‘맨허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실험 물리학자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는 B-29 폭격기에 올라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파괴력을 직접 측정했다. 그는 당시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작전에 참가한 것이 무척 후회스럽다”고 하는 한편, “(가공할 위력의 폭탄으로 전쟁이 억제될 수 있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다”고 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또 이를 정당화해온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앨버레즈의 말처럼 2발의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그것은 새로운 핵무기 개발 경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원자폭탄 만들기>(1986)로 원자폭탄 개발의 역사를 다뤘던 저술가 리처드 로즈는 후속작인 <수소폭탄 만들기>(1995)를 통해 여태까지 인류가 개발한 가장 파괴적인 무기인 수소폭탄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000여건의 문헌과 관련 인사들의 육성 증언을 끌어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지은이는 이런 형식에 대해 ‘베리티’라는 이름을 붙인다. ‘진실을 진술한 것’이란 뜻 정도로 파악된다. 종전 이전부터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인지했던 소련은 스탈린의 오른팔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앞세워 핵무기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맨허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클라우스 푹스로부터 받은 정보가 주된 뼈대가 되어, 마침내 소련은 1949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 트루먼 정부는 1950년 에드워드 텔러의 열핵무기 연구에 근거에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천명했다. “국제 협상의 정치 지렛대로 말고는 사용할 의도가 없으면서도 위협적인 핵무기를 계속 유지 확대하는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급기야 미국은 1952년 히로시마를 파괴한 원자폭탄 ‘리틀보이’보다 출력이 1000배 강한 최초의 수소폭탄 ‘아이비 마이크’의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그 뒤 대규모 군비 경쟁과 국제 사회의 위협은 날로 증가했고, 1960년대 벌어진 미국과 소련 사이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그 정점이었다. 지은이는 어리석은 군비 경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핵 억지력’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에 눈길을 준다. 지은이는 “군비 경쟁은 소통과 학습의 과정”이었다며, “(핵무기의 문제는) 결국 인류가 전쟁과 다툼 없이 자제하면서 처신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9개의 원자폭탄을 괌으로 보내 한반도 또는 중국을 공격할 상황에 대비했다거나, 한국전쟁 종전 뒤 이승만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찾아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싶다”며 전쟁을 부추겼다가 그러면 “민주주의는 망하고 문명은 파괴될 것”이라는 핀잔을 받았다는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흥미롭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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