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 주의 시인, 황인찬
내 유년의 가장 강렬했던 두 기억. 다섯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살던 곳은 서울 서초동의 법원 아래로 이어지는 언덕길에 늘어선 허름한 집 가운데 한 곳으로, 거기서 부모님과 조부모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지냈다. 그때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고, 어릴 적의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며 그나마 기억나는 것도 가족 앨범 등을 보며 사후에 다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싶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강렬하게 내 기억에 자리 잡아 아직도 나를 지배하는 몇 이미지들이 있는데, 다섯 살 적의 어떤 기억들은 그중에서도 거의 최초의 것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울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이기도 하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침마다 쥐를 잡던 기억이다. 할머니는 아침이 되면 밤새 놓은 쥐덫에 쥐가 잡혀 있는지 확인했다. 덫이 비어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세상엔 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아침마다 쥐를 잡아도 쥐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나의 아침은 쥐덫에 갇힌 쥐가 우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시작되는 셈이었다. 할머니는 쥐가 잡힌 쥐덫을 그대로 물을 가득 담은 고무 동이에 빠뜨리셨다. 그러면 더 이상 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자리를 비우신 동안 물속을 가만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면 흔들리는 수면 너머 움직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당시의 내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며 느꼈던 이상한 꺼림칙함만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죽음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 불가해함이 나를 더욱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뜨리는 무엇인가였다. 매일 나는 그 알 수 없는 것을 마주하곤 하였다. 다섯 살 때의 그 아침들은 죽음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었고, 동시에 매일 계속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주 궁금했다. 물에서 그것을 건져 올린 뒤 할머니는 그걸 어떻게 하셨던가? 죽음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들은 지금까지 나에게 알 수 없는 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기억. 다섯 살 무렵의 나에게는 별다른 친구가 없었고, 많은 시간을 동생과 보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고독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 언덕길을 걷곤 했다. 땅바닥에 섞인 작고 반짝이는 유리 조각, 누군가 흘리고 간 구슬, 땅에 고인 물웅덩이 따위를 한참 보곤 하였다. 손가락을 살짝 내밀어 만져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이 손에 닿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걷다가 위를 걸어 오르다 보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그것은 흰 법원이었다. 새하얀 법원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작고 작은 나는 그 앞에서 더욱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동네에 살면서도 그 법원이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간 적은 없다. 나는 그 이상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곤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건물을 법원이라고 부른다고 내게 알려주시며 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시곤 하셨다. 저곳은 나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죄를 지으면 저 앞에 서 있어야만 한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일이 두렵게 여겨졌던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언덕을 오르내리는 흰 경찰차들을 보며 나는 자주 몸을 움츠렸다.
이 기억들은 나의 최초의 기억들로 여전히 나에게 상당히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을 잊지 않은 채로 나는 자라 어느 순간엔가 시인이 되었고, 어느 날엔가 한 편의 시를 썼다. 그것은 ‘법원’이라는 시였다. 앞서 언급한 기억들을 다시 시로 정리해낸 것으로,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정리하는 일이기도 했다. 죄라는 것은 무엇일가. 죄책감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나의 최초의 기억은 죄와 죄책감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 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황인찬 시인
* 2010년 <현대문학>에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구관조 씻기기>로 제31회 김수영문학상(2012년) 수상. <희지의 세계>를 냈다.
실내의 윤리, 실내에 있는 것과 없는 것 ‘나’는 말하고 듣고 읽고 쓴다. 생각하고 직감한다. 이것이 내가 가진 능력이며 세계와 접촉하는 방법이다. 나는 이 일들에 서툴거나 이상한 능력을 지녔다. 나는 미미하게 말하고, 잘못 듣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안 읽거나 더 읽고, 침묵에 필적하기를 바라며 쓴다. 생각해야 할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좋았을 것들과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직감한다. “맥락도 출처도 알 수 없는 그것”(‘세컨드 커밍’)들과 함께인 이곳의 이름은 “실내”.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네가 아닌 병원’). 황인찬이 만든, 세상에 단 한 권뿐인 ‘한국어사전’에서 ‘실내’는 우리의 세계를 뜻한다. 실내는 “희박하고 조용한 생활”이 요구되는 곳, 그중 사람들이 모여 담화를 나누는 “거실의 공기는 너무 희박해서 숨 쉬는 일도 어려운” 공간이다(‘거주자’). 실내는 우리가 언제 어떤 문을 통해서든 이미 입장(入場)해 있는 곳, 어떤 장소든 택해야 하는, 즉 입장(立場)을 가져야 하는 곳이다. 실내에는 버려진 공간이 없거나 적고, 안락함을 위해 제외되는 것이 많다.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는 신뢰의 부재(‘혼자서 본 영화’), “말하는 선생님”과 “다음 주에나 듣게 되는 나”의 언어의 시차 등은 대수롭지 않게 간주된다(‘입장’). 실내는 문명, 제도, 관습, 문학·예술 등의 가구와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 들어올 때 황인찬은 죄책감을 지불해야 했다,고 말한다. ‘실내의 생활’(이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죄책감이라는 것은 ‘실내의 윤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한다. 그에 맞춰 활동과 존재감을 최소화해 온 것이 ‘나’의 삶이었다. 말하고 듣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직감하는 모든 일에서,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불확실한 느낌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민한 슬픔에 휩싸이면서. 삶의 각도나 위치를 약간 바꿀 때마다 마치 ‘개종’하는 심정이었던 것은 ‘실내의 윤리’를 거절하는 ‘나’의 윤리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실내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못한 것이다”(‘말종’).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법원 황인찬
아침마다 쥐가 죽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밤새 놓은 쥐덫을 양동이에 빠뜨렸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할머니는 흔들리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고, 어느새 죽은 것이 물 밖으로 꺼내지곤 하였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대체 저걸 어떻게 하셨나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대문 밖에 나와서 앉아 있는데 하얀색 경찰차가 유령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고, 어느새 죽은 것이 물 밖으로 꺼내지곤 하였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대체 저걸 어떻게 하셨나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대문 밖에 나와서 앉아 있는데 하얀색 경찰차가 유령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황인찬 시인
실내의 윤리, 실내에 있는 것과 없는 것 ‘나’는 말하고 듣고 읽고 쓴다. 생각하고 직감한다. 이것이 내가 가진 능력이며 세계와 접촉하는 방법이다. 나는 이 일들에 서툴거나 이상한 능력을 지녔다. 나는 미미하게 말하고, 잘못 듣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안 읽거나 더 읽고, 침묵에 필적하기를 바라며 쓴다. 생각해야 할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좋았을 것들과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직감한다. “맥락도 출처도 알 수 없는 그것”(‘세컨드 커밍’)들과 함께인 이곳의 이름은 “실내”.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네가 아닌 병원’). 황인찬이 만든, 세상에 단 한 권뿐인 ‘한국어사전’에서 ‘실내’는 우리의 세계를 뜻한다. 실내는 “희박하고 조용한 생활”이 요구되는 곳, 그중 사람들이 모여 담화를 나누는 “거실의 공기는 너무 희박해서 숨 쉬는 일도 어려운” 공간이다(‘거주자’). 실내는 우리가 언제 어떤 문을 통해서든 이미 입장(入場)해 있는 곳, 어떤 장소든 택해야 하는, 즉 입장(立場)을 가져야 하는 곳이다. 실내에는 버려진 공간이 없거나 적고, 안락함을 위해 제외되는 것이 많다.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는 신뢰의 부재(‘혼자서 본 영화’), “말하는 선생님”과 “다음 주에나 듣게 되는 나”의 언어의 시차 등은 대수롭지 않게 간주된다(‘입장’). 실내는 문명, 제도, 관습, 문학·예술 등의 가구와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 들어올 때 황인찬은 죄책감을 지불해야 했다,고 말한다. ‘실내의 생활’(이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죄책감이라는 것은 ‘실내의 윤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한다. 그에 맞춰 활동과 존재감을 최소화해 온 것이 ‘나’의 삶이었다. 말하고 듣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직감하는 모든 일에서,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불확실한 느낌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민한 슬픔에 휩싸이면서. 삶의 각도나 위치를 약간 바꿀 때마다 마치 ‘개종’하는 심정이었던 것은 ‘실내의 윤리’를 거절하는 ‘나’의 윤리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실내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못한 것이다”(‘말종’).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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