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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슬픔이 된 고전 읽기

등록 2016-08-25 19:23수정 2016-08-25 22:45

주원규의 다독시대
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민음사(2010)

고전을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고전에 대한 통상적 기대를 갖기 마련이다. 미학의 원형을 탐색한다든지, 작품에 스며든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미래의 반면교사로 삼는 식의 기대 말이다. 이렇듯 고전은 여러 면에서 독자들에게 힘을 준다. 보편적 감동을 통해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왔으며, 미래를 조망함에 있어 탁월한 길잡이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런데 분명 고전임에도 이른바 미래 전망은 고사하고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도 불투명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올려 이야기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20세기 초반 영국 출신 작가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민음사·2010)가 그렇다.

<1984>는 한마디로 슬픈 고전이 되어버렸다. 왜 그럴까. <1984>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고전이 줄 수 있는 미덕인 미래 전망과 과거에 대한 복기, 이 두 가지를 철저히 거부하고 시대의 야만을 현실보다 더 적나라하고 솔직한 어조로 은유하기 때문이다.

1984년에서 어느덧 30여년이 더 지났다. 하지만 소설 <1984>가 그려낸 시커멓게 그을린 디스토피아는 도리어 과거를 그리워할 정도로 무섭게 악진화(惡進化)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맞이한 전체주의 살풍경과 그로 인한 망국적 파행에 대한 고발과 동일해 보인다.

빅 브러더를 내세워 독재권력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시도는 불통을 넘어서서 불임에 가까운 소통 부재로 일관한 대한민국 정부의 축소판에 다를 바 없다. 또한 독재권력 강화를 위해 내세운 적, 하지만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적인 골드스타인의 망령은 걸핏하면 종북 운운하는 매카시즘의 재생산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소설 속 당에 의해 주도되는 섹스의 통제는 또 어떤가. 독재를 동경하는 정부가 무능의 속살을 드러낼 때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연예계 가십거리가 언론 전면을 도배하는 비틀린 관음증과 뭐가 다른지 묻고 싶다.

아울러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이 시도했던 개인 존엄의 회복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 체제전복 시도 역시 같은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의 배신으로 인해 험악하게 짓뭉개진다. 체제전복을 위해 마련된 지하당원의 배신 역시 독재권력에 맞서고자 하는 저항의 의지가 감시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얼마나 무딘 칼날로 벼려지고 있는지 심한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1984>는 안타깝게도 30여년 전 과거가 아니다. 한가롭게 미학적 감흥 운운하는 고전도 아니다. <1984>는 바로 독재와 무능의 진창 속에 속수무책으로 파묻혀 버린 우리의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1984>의 주인공 윈스턴처럼 철저한 왜곡을 강요받으며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1984>의 디스토피아가 현재진행형이 아닌 철저히 청산되어야 할 과거 속 유물로 남아주길 말이다. 어느새 슬픈 고전이 되어버린 <1984>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오직 그뿐이다.

주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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