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
민종덕 지음/돌베개·2만5000원
1970년 11월13일 청계천에서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고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머니 이소선(1929~2011)은 아들을 대신해 새로운 삶을 살았다. 온몸이 까맣게 그을려 병원에 누운 전태일은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달라”고 했고, 이소선은 “기필코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41년 동안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이소선은 2011년 9월3일 별세할 때까지 한평생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전태일의 일기를 접한 뒤 청계피복노조에 몸담고 노동운동을 해온 지은이 민종덕씨는 1990년 이소선의 회갑 기념으로 1970년대 말까지 이소선의 삶을 정리해 <어머니의 길>이란 책을 펴낸 바 있다. 민씨는 2012년 8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려다 무산된 일을 겪으며, “이소선 및 동시대를 살면서 싸웠던 모든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전태일 정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5주기를 맞아 이소선의 삶 전체를 담은 평전을 내게 된 계기다.
1986년 분신 항거한 노동자 박영진의 영결식장에서 발언하는 이소선의 모습. 전태삼 제공
1929년 11월 경북 지역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이소선은, 동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듯 빈곤에 맞서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야 했다.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데려온 자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열여섯 나이에 일제의 근로정신대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기도 했다. 결혼 뒤에는 네 자녀를 먹여 살리려고 고향을 떠나 남의 집 앞에서 노숙을 전전하는 도시 빈민으로 살기도 했다. 그러나 고된 삶 속에서도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거침없는 성격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큰아들 전태일이 죽은 뒤 이소선의 삶은, 우리나라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 그 자체였다. 전태일의 뜻을 받든 동료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했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독재정권과 사용주들에 맞서는 길고 험난한 투쟁에 나섰다. 주휴도 지키지 않는 하루 12~14시간의 노동과 저임금, 산업재해의 위협,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등 노동자의 삶 전체가 ‘투쟁 현장’이었다. 공권력, 자본 권력의 감시와 폭력은 일상이었고 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강제 해산’ 조처를 당하는 등 위기도 많았지만, 청계피복노조는 꾸준히 저항하며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노동교실 개관 등 성과들을 쌓았고 민주노조 운동의 큰 흐름을 만들었다. 지은이는 이소선의 구술에 더해 다양한 기록 자료들을 망라하여 그 역사들을 촘촘하게 정리했다.
전태일의 묘 뒤에 자리한 이소선의 묘소. 민주노총 제공
이소선이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불린 이유는, 단지 그가 노동운동의 불꽃을 댕긴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상징적인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대변인이 되어, 그 누구라도 끌어안고 함께하려 했던 광범위한 실천 때문이었다. 지은이는 “이소선은 굳이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의 투쟁’이라는 이론은 몰랐을지라도, 노동자 문제에 대한 구분 없는 인식을 갖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모든 구조적 모순에 대해 온몸으로 대담하게 투쟁했다”고 말한다.
전태일이 죽은 뒤 여섯달도 채 안 됐을 무렵, 한영섬유에서 노조 탈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김진수라는 노동자가 용역 깡패에게 드라이버로 머리를 찔려 사경을 헤맸다. 소식을 들은 이소선은 당장 김진수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1976년 풍천화섬의 민주노조 결성 투쟁에 함께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유신정권과 신군부 정권 아래에서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이기도 했다. 이소선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창립하는 등 민주화운동 전선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2011년 세상을 뜨기 얼마 전까지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 등에 연대의 힘을 실었다.
지은이는 “어머니는 ‘인간 차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이 말을 이소선의 온 생애를 일관하는 “핵심 사상”으로 꼽았다. “인간을 차별하는 불평등, 인간 소외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관통한다”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모든 나”와 “나를 아는 모든 나”에게 ‘인간답게 살자’는 메시지를 전한 전태일의 삶과, “이 땅의 억압받는 모든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 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는 이소선의 삶이 하나로 이어진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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