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 주의 시인, 김혜순
포르말린 강가에서 서른 사흘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직 살아 있다.
시를 쓰고 있나 보다.
흐릿한 이미지에 풍덩 하고 있다.
외갓집 문을 바람처럼 열고 있다.
죽은 외할머니의 품속에 뛰어들려는 찰나. 없는 눈이 번쩍 떠지자
사라진 몸의 어딘가가 환생한
검정 작대기가 대갈통을 후려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프다. 너는 네 밖에 있는 사람.
밖이 아픈 사람. 사라진 발가락들이 아프다.
흩어진 방들이 아프다. 심장이 아프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열 손가락으로 온몸을 긁고 있다.
피 맺히게 긁고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떠난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시험관을 떠난다.
연쇄살인범의 비닐봉지에 담긴 머리처럼
흔들흔들 떠난다. 말하고 싶은데 다 말하고 싶은데
입은 다물리고
손은 떨리고
신발은 어디 갔나. 시험관 안으로 검푸른 밤의 뿌리가 내려온다.
실험실의 사람들마저 떠나고
시험관의 뇌는 중얼거린다.
내 안의 희디흰 괴물
푸른 잠옷을 입었네. 너는 물처럼 투명해
감촉도 부드러워
그렇지만 독사의 푸른 침처럼 치명적이야. 시험관의 뇌는 방관자의 뇌 살아남은 자의 뇌. 시험관에 담긴 뇌는 늘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울고 싶다.
포르말린 강에 담긴 뇌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 시같이 막연한 곳
이 시같이 애매한 곳
이 시같이 소독된 곳 시험관의 뇌는 포르말린 모자를 쓰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밖은 왜 늘 아픈가. 없는 두 발은 왜 아픈가.
두 발바닥을 받친 강바닥은 왜 무너지는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다리 난간에 서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소리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미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어떻게 하면 잊냐고.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수록
시를 쓰고 있나 보다.
흐릿한 이미지에 풍덩 하고 있다.
외갓집 문을 바람처럼 열고 있다.
죽은 외할머니의 품속에 뛰어들려는 찰나. 없는 눈이 번쩍 떠지자
사라진 몸의 어딘가가 환생한
검정 작대기가 대갈통을 후려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프다. 너는 네 밖에 있는 사람.
밖이 아픈 사람. 사라진 발가락들이 아프다.
흩어진 방들이 아프다. 심장이 아프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열 손가락으로 온몸을 긁고 있다.
피 맺히게 긁고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떠난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시험관을 떠난다.
연쇄살인범의 비닐봉지에 담긴 머리처럼
흔들흔들 떠난다. 말하고 싶은데 다 말하고 싶은데
입은 다물리고
손은 떨리고
신발은 어디 갔나. 시험관 안으로 검푸른 밤의 뿌리가 내려온다.
실험실의 사람들마저 떠나고
시험관의 뇌는 중얼거린다.
내 안의 희디흰 괴물
푸른 잠옷을 입었네. 너는 물처럼 투명해
감촉도 부드러워
그렇지만 독사의 푸른 침처럼 치명적이야. 시험관의 뇌는 방관자의 뇌 살아남은 자의 뇌. 시험관에 담긴 뇌는 늘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울고 싶다.
포르말린 강에 담긴 뇌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 시같이 막연한 곳
이 시같이 애매한 곳
이 시같이 소독된 곳 시험관의 뇌는 포르말린 모자를 쓰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밖은 왜 늘 아픈가. 없는 두 발은 왜 아픈가.
두 발바닥을 받친 강바닥은 왜 무너지는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다리 난간에 서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소리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미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어떻게 하면 잊냐고.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수록
시험관에 담긴 뇌 올해 김혜순은 세 권의 작품집을 펴냈다. 시집 <죽음의 자서전>과 <피어라 돼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세 권의 제목은 김혜순 식 발화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몇 개의 인칭에 고정된 ‘인간화된 발화’의 협소한(폭력적인) 체재를 거절하고, 사건과 만물과 언어 자체가 말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죽음의 자서전>은 ‘죽음’이 스스로 말하는 죽음의 이야기이다. <피어라 돼지>는 인간을 위협하는 질병에 걸린 이유로 학살당한 수많은 가축들과 이와 다를 바 없이 갖가지 이유로 타살된 인간들, 이 와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돼지’임을 선언하며(현 정권이 “개, 돼지”로 칭한 것과는 정반대의 윤리로) 죽은 돼지들의 식물적인(비폭력적인) 재생을 열망하는 ‘(인간-)돼지’의 이야기이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라고 설파한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패러디한 것으로, ‘않아’라는 언어가 한 말을 받아 쓴 ‘언어의 어록’이다. 스스로 자서전을 쓰는 ‘죽음’이 개별자의 구체적 형상(시체)으로 현시될 뿐 육체가 없는 발화의 주체라면, “피어라 돼지”(!)라고 애통히 축원하는 이는 실제의 돼지거나 인간-돼지거나 누구인지 규정할 필요가 없는 발화의 주체다. ‘않아’는 모든 행위와 상태에 부정성을 가하는 언어 자체가 입을 벌려 생겨난 발화의 주체다. 이들은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시야와 윤리성을 지니며, 살아 있는 존재와 세계의 온전한 형상을 증언한다. 김혜순은 시와 시인의 역할이 이 주체들을 발견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건이든, 사물이든, 언어 자체든, 인간(여성)이든 김혜순은 세계의 ‘안’에 밀폐되었거나 ‘바깥’에 떠도는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건져 올려 말문을 틔운다. 고대의 무당부터 현대의 비판적 모더니스트까지 역사적으로 시인이 해온 모든 역할을 통합 실천 중인 김혜순은, 이 세계가 만든 끔찍한 “시험관”들이 부서지고 그 “시험관에 담긴 뇌”가 육체와 목소리를 얻기를 바란다. 그 시험관을 만든 것이, 시험관에 담긴 뇌가 ‘나’(의 일부)임을 잊지 않으면서.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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