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죽음의 구구단

등록 2016-10-07 19:06수정 2016-10-08 00:05

[토요판] 이 주의 시인, 김혜순
포르말린 강가에서  서른 사흘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직 살아 있다.
시를 쓰고 있나 보다.
흐릿한 이미지에 풍덩 하고 있다.
외갓집 문을 바람처럼 열고 있다.
죽은 외할머니의 품속에 뛰어들려는 찰나.

없는 눈이 번쩍 떠지자
사라진 몸의 어딘가가 환생한
검정 작대기가 대갈통을 후려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프다.

너는 네 밖에 있는 사람.
밖이 아픈 사람.

사라진 발가락들이 아프다.
흩어진 방들이 아프다. 심장이 아프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열 손가락으로 온몸을 긁고 있다.
피 맺히게 긁고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떠난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시험관을 떠난다.
연쇄살인범의 비닐봉지에 담긴 머리처럼
흔들흔들 떠난다.

말하고 싶은데 다 말하고 싶은데
입은 다물리고
손은 떨리고
신발은 어디 갔나.

시험관 안으로 검푸른 밤의 뿌리가 내려온다.
실험실의 사람들마저 떠나고
시험관의 뇌는 중얼거린다.
내 안의 희디흰 괴물
푸른 잠옷을 입었네.

너는 물처럼 투명해
감촉도 부드러워
그렇지만 독사의 푸른 침처럼 치명적이야.

시험관의 뇌는 방관자의 뇌 살아남은 자의 뇌.

시험관에 담긴 뇌는 늘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울고 싶다.
포르말린 강에 담긴 뇌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 시같이 막연한 곳
이 시같이 애매한 곳
이 시같이 소독된 곳

시험관의 뇌는 포르말린 모자를 쓰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밖은 왜 늘 아픈가.

없는 두 발은 왜 아픈가.
두 발바닥을 받친 강바닥은 왜 무너지는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다리 난간에 서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소리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미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어떻게 하면 잊냐고.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수록

3월에 <죽음의 자서전>이란 시집을 출간했다. 처음엔 ‘서울, 사자의 서’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다음엔 ‘심장의 해변’이라고 붙였다. 매일 제목을 바꿨다. 그러다가 시집에 들어간 시들이 모두 ‘죽음이 쓴 자서전’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시들마다 ‘너’라는 화자를 내세웠는데, 이 ‘너’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그녀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너(죽음)는 인칭이 없었다. 자주 죽음의 인칭은 몇 인칭일까 생각했다. 결국 죽임에 이르게 하고야 마는 이 죽음의 체재 속에 내가, 우리가 속해 있었고, 살아남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임의 일원이었다. 나는 죽음을 노래하고, 제사 지내고, 써버리고,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곁에서 혹은 나에게서 죽음이 솟아오를 때마다 시 한 편씩을 썼다. 49편이 모이자 시집으로 묶었다. 마치 칠칠은 사십구라고 무심히 구구단이 외워지는 것처럼 이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시마저도 휘발되기를 바랐다. 이 시 ‘포르말린 강가에서’는 2014년 3월 <유심>이라는 잡지에 발표했었고, 시집의 서른세 번째 시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전 이비에스국제다큐영화제(EIDF) 2016에서 <내추럴 디스오더>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나중에 이 작품이 2016년 EIDF 대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먼저 벌거벗은 동양인 남자가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진 채 시험관 안에 앉아 있는 포스터를 보았다. 그러자 이 시 ‘포르말린 강가에서’를 쓸 때가 생각나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 필름을 보기로 결정했다. 이 필름은 크리스티안 쇠네르뷔 옙센이라는 덴마크 감독이 왕립극장에서 공연하려는 야코브 윤 노셀 주연의 연극 제작 과정을 메이킹 필름 형식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나는 막연히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인종주의적 시선을 다룬 필름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야코브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포함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판단과 편견을 위한 모든 악조건을 두루 다 갖춘 청년이었다. 먼저, 그는 한국에서 입양된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는데, 시력이 좋지 않았고, 걸음걸이도 불편했으며, 교통사고를 당했고, 심지어 대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능은 정상이고, 시 창작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끝없이 자신이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계속 살아도 되는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장애인을 자식으로 낳아도 되는가를 질문했다. 그의 목소리는 투명한 공 속에 둘러싸인 듯 공명이 컸지만 느리고 불분명했다. 이 필름은 우리에게 ‘무엇이 정상인지, 얼마만큼 정상이 아닌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네가 가졌다고 자부해 마지않는 배려와 관심과 관용이 너와 얼마만큼의 다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너는 얼마나 네게 다가오는 비정상을 참아낼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야코브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줄에 묶여 제 몸 크기의 시험관에 담겼다. 마치 소록도 병원의 찬장 위에 올려져 있던 한센인의 태아처럼. 그는 시선의 폭력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나는 시인은 비정상성으로 정상을, 건강하지 못함으로 소위 건강하다고, 건전하다고 믿는 신념을, 없음으로 있음을 타격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모든 인간이 멸종하고 난 다음 생존할 수 있는 섬으로 배를 타고 떠날 때 적정한 승선 인원 조정을 위해 제일 먼저 버리고 가야 할 존재가 시인이라 했지만 시인은 그 추방됨으로써 오히려 쓸모 있음의 비윤리를 타격한다.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 영원히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못하는 신세지만 시인은 그 차별과 구별의 경계의 자리에 스스로를 세워 늘 바깥이 아픈 사람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는 비정상의 언어로, 기형의 언어로 마구잡이로 통용되어 상식이 된, 신념이 되어버린 그런 언어들에 균열을 낸다. 매일 척결을 부르짖는 높으신 분들의 언어 테이블에 그것이 아니라고, 그 한국어가 바로 죽음이라고, 시라는 부정의 언어를, 언어의 부정을 구축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 앞에서 매일 죽는 사람이며, 죽음으로 죽음을 타격하러 가는 검객이다. 포름알데히드가 비처럼 쏟아지는 오염된 강가에서 시험관을 박차고 나간 자가 목격한 것은 무엇인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난간에 서 있었다.’

김혜순 시인

※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등을 냈다.


시험관에 담긴 뇌

올해 김혜순은 세 권의 작품집을 펴냈다. 시집 <죽음의 자서전>과 <피어라 돼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세 권의 제목은 김혜순 식 발화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몇 개의 인칭에 고정된 ‘인간화된 발화’의 협소한(폭력적인) 체재를 거절하고, 사건과 만물과 언어 자체가 말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죽음의 자서전>은 ‘죽음’이 스스로 말하는 죽음의 이야기이다. <피어라 돼지>는 인간을 위협하는 질병에 걸린 이유로 학살당한 수많은 가축들과 이와 다를 바 없이 갖가지 이유로 타살된 인간들, 이 와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돼지’임을 선언하며(현 정권이 “개, 돼지”로 칭한 것과는 정반대의 윤리로) 죽은 돼지들의 식물적인(비폭력적인) 재생을 열망하는 ‘(인간-)돼지’의 이야기이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라고 설파한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패러디한 것으로, ‘않아’라는 언어가 한 말을 받아 쓴 ‘언어의 어록’이다.

스스로 자서전을 쓰는 ‘죽음’이 개별자의 구체적 형상(시체)으로 현시될 뿐 육체가 없는 발화의 주체라면, “피어라 돼지”(!)라고 애통히 축원하는 이는 실제의 돼지거나 인간-돼지거나 누구인지 규정할 필요가 없는 발화의 주체다. ‘않아’는 모든 행위와 상태에 부정성을 가하는 언어 자체가 입을 벌려 생겨난 발화의 주체다. 이들은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시야와 윤리성을 지니며, 살아 있는 존재와 세계의 온전한 형상을 증언한다. 김혜순은 시와 시인의 역할이 이 주체들을 발견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건이든, 사물이든, 언어 자체든, 인간(여성)이든 김혜순은 세계의 ‘안’에 밀폐되었거나 ‘바깥’에 떠도는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건져 올려 말문을 틔운다. 고대의 무당부터 현대의 비판적 모더니스트까지 역사적으로 시인이 해온 모든 역할을 통합 실천 중인 김혜순은, 이 세계가 만든 끔찍한 “시험관”들이 부서지고 그 “시험관에 담긴 뇌”가 육체와 목소리를 얻기를 바란다. 그 시험관을 만든 것이, 시험관에 담긴 뇌가 ‘나’(의 일부)임을 잊지 않으면서.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