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 최승자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詩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에 수록
도대불
도대불은 어부들이 해질 무렵 바다로 갈 때 불을 켜 두었다가 아침에 들어오면서 끄곤 했다는 제주도 민간 등대의 이름이다. 김녕(제주도 제주시 구좌읍)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어느 날 노을에 끌려 이곳에 와 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의자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를 겨우 가릴 정도의 작은 몸집이다. 서쪽으로 지는 노을을 수없이 바라봤을 할아버지는 흡사 조용한 의식을 치르듯 뭔가에 사로잡혀 있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 보름쯤 지났을까.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 노인이 궁금해져서 다시 등대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역시 노을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처음 본 그날처럼 깊고 오래되고 말없는 시선으로 서쪽을 향해 앉아서.
1972년 김녕 해안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마을 어부들은 생선기름이나 솔칵(송진 박힌 옹이)으로 불을 밝히고 바다로 나가곤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그 어부 중 한 명이었을까. 밤새 바닷일을 하고 아침에 항에 도착해 등대의 불을 끄던 어부였을까. 밤바다와 밤하늘. 넓은 공간 먼 공간. 노을이 지는 날이면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사람. 그가 어떻게 한 세계를 건널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최승자 시인의 시 ‘어떤 풍경’을 읽으면 그가 보이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폭풍
얼마 전 제주에 상륙한 태풍 차바의 바람과 비는 내가 일 년 이상 거주했던 노란 컨테이너를 담장 너머 이웃 밭까지 날려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지하 작업실은 양수기로 물을 퍼내야 할 정도로 잠겨 있었고 식당 뒤편의 숙소 벽도 갈기갈기 뜯겨 있었다. 내가 속한 밴드 허클베리핀의 싱글 발표를 앞두고 서울 녹음실에 있던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잔 채 복구를 위해 서둘러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태풍이 쓸고 간 직후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제주 바다는 어찌나 고요하고 푸르던지. 그런 고요함이 이 시에 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사람이 맞이한 고요. 그에게서는 연기가 나는 것 같다. 그의 귀에 귀 기울이면 폭풍우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그의 눈에서는 그가 부딪혀온 태풍이 보일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책상 앞에서 시집을 뒤적이고 있는 것이다. 공기가 크게 휘청거릴 것 같은데 책장 넘어가는 소리뿐이다.
검은 바다
소리로 공간을 넓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주던 검은 바다에 처음으로 몸을 들이던 밤, 내 귀에 찰랑거리며 물 부딪히던 소리. 온통 적막한 가운데 밤하늘에 빛나던 별.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오래전에 홀로 물속으로 들어왔던 누군가가 느꼈을 감각을 나 역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시간도 공간도 확장되었다. 나는 황홀해졌다.
음악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 시의 첫 번째 연에 그려진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두려움을 통과하느라 연락이 끊겼고, 그러면서 강해졌고, 그러고선 돌아와 아직 말이 없다. 그가 무엇을 표현한다면 그 안에는 그가 멀리 가야만 볼 수 있던 것들이 꼭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사람은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다.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스왈로우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