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등록 2017-02-23 18:45수정 2017-02-23 20:38

주원규의 다독시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2006)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를 지배한 악은 평범하다고 보는 게 맞다. 흔히 떠올리는 악의 포악함과 즉물적 사특함이 발발하는 이유 역시 그 악이 일종의 보편성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악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국가가 최소한 지켜내야 할 관계의 윤리의식, 인간 존엄에 근거해 구축해 온 원칙의 파괴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악은 눈에 드러난 포악과 더불어 그 기저에서부터 평범의 이름을 가장해 스며들어 버렸다. 한 마디로 악이 체질이 되어버린 이들은 악을 지극히 평범한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되는 악의 평범성은 두 가지 양태로 본격화된다. 그 하나는 기저에 스며든 악의 정서, 공동체의 합의 파괴를 더 이상 악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감각이다. 이 무감각에 세뇌된 이들은 그들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이 정의, 질서, 윤리라고 떠들어대며 사회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또 하나는 기저를 잠식한 악행이 표면적으로만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고분고분해진다는 이유로 쉽게 용서하고 무마하려는 시도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러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연구의 집대성이다.

이 책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사실적 보고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치밀하게 해부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괴물을 해명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한나 아렌트의 학문적 결실이다. 그녀 자신과 같은 해 태어나 나치당의 유대인 학살을 집행하는 일을 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나치즘의 전거로 삼아 나치즘의 본질을 이야기체 형식으로 하나하나 분석해나간다. 아렌트는 유대인의 학살을 직접 집행했던 아이히만이 어머니와 애인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인간이란 사실에 기인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보편적 명제를 도출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고.

물론 ‘예루살렘 아이히만’ 연구가 품고 있는 자체의 모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홀로코스트의 주역인 아이히만이 품은 무감각한 죄의식, 그 배후를 성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접근이지만 자칫 오해하면 아이히만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광들이 자행한 명백한 범죄에 대해 간과해버리는 위험성이 다분한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다가오는 3월을 새로운 봄으로 맞이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평범의 이름으로 파고든 통념, 그 뒤편에 자리 잡은 독재의 망령을 거둬내는 일이 가장 시급하지 않을까. 여기에 또 하나. 이것은 객체들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의 비극이요, 우리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란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어설픈 화해 시도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철저히 복기되고 응당 그에 맞는 청산 작업이 선행되지 않는 화해는 분명히 밝히지만 화해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독재의 향수에 빙의되어 온갖 악행을 자행해 온 이들의 죄를 제멋대로 사해준 악의 공범인 것이다.

평범해진 악은 단연코 끔찍하다. 악의 평범성이 어느 것이 참된 선한 의지인지 불명확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주원규 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