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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 ‘봉인’의 표절시비에 부쳐

등록 2005-11-10 19:43수정 2005-11-12 00:33

최재봉 기자
최재봉 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한동안 잠잠하던 표절 논란이 또 한 번 불거져 문단 안팎을 달구고 있다. 이번에 문제된 것은 권지예씨의 단편소설 <봉인>으로, 올 4월 펴낸 소설집 <꽃게 무덤>(문학동네)에 실린 작품이다. <꽃게 무덤>은 얼마 전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때문에 표절 논란이 수상의 적정성에 관한 시비로까지 확대되었다.

<봉인>이 ‘표절’한 것으로 지목된 글은 인터넷 인기 필자인 의사 박경철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은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제목의 책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라는 소제목으로 실렸다. <…아름다운 동행>은 <꽃게 무덤>보다 조금 먼저 출간되었는데, 작가 권씨는 책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박씨의 글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봉인>에 대한 표절 혐의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제기된다. 하나는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의 이야기가 <봉인>에 고스란히 들어갔다는 ‘소재 차용’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문장 차원의 ‘베끼기’다. <봉인>은 죽음을 둘러싼 세 가지 삽화를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를 천착한 작품인데, 그 중 한 삽화가 <사랑이 깊으면…>의 이야기와 동일한 스토리라인을 지니고 있다. 복벽결손인 상태에서 태어난 신생아가 의료진의 노력과 엄마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되며 그 뒤 산모 역시 목을 매 죽는다는 내용이다. <봉인>은 의료진이 ‘사일로’라는 치료법을 동원한다든가, 투병하는 아기의 손에 엄마가 묵주를 쥐어 준다는 설정까지도 그대로 가져왔다.

‘사일로’라는 치료법을 설명하는 문장은 베끼기라는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장을 배의 중간으로 모아 바셀린을 바른 거즈로 장을 둘러싼 다음 아이스크림의 콘 모양으로 만들면, 중력으로 아래쪽 장부터 배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인용한 문장은 소설 <봉인>에서 ‘사일로’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 문장은 <사랑이 깊으면…>의 문장과 거의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거즈로” 다음에 “장을”을 한 번 더 썼다는 점뿐이다. ‘사일로’란 전문적인 의료 용어이며 그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박씨 고유의 창작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 다른 사람의 문장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가져온 것은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 말 박경철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어느 유명작가의 표절 시비에 대해’라는 글을 올리면서 점화된 논란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뜨겁게 확산되었으며 박씨는 결국 지난 7일 자신의 블로그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박씨는 블로그를 닫으면서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애초에 <봉인>에 대해 법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던 태도를 바꾸어 향후 대책을 “원점에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밝혀 불씨를 남겼다.

어찌 보면 사소한(?) 실수로 지나칠 수도 있었을 문제가 이처럼 꼬인 것은 작가와 출판사 쪽의 미숙한 대처 탓으로 보인다. 작가 권씨는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소설에 써먹은 것을 두고 표절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느냐면서 책의 다음 판을 내면서 출처를 밝히겠노라고 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 역시 소재 차용일 뿐 표절은 아니라며 박씨에게는 사후 감사 표시 정도가 합당하다는 공식 견해를 내놓았다.

관찰자가 보기에 사태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하다. 권씨가 사전에 출처를 몰랐다면 사후에라도 사실을 인정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 박씨에게 사과했어야 마땅하다.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가 생략됐기 때문에 박씨와 그의 블로그 방문자들을 비롯한 문단 바깥 사람들에게 이 사태는 문단 권력자들의 횡포로 비치는 것이다. 논란의 두 당사자가 서로 상처 입지 않는 방향에서 원만한 해결책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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