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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기 노루 밤비는 정말 유대인이었을까

등록 2017-04-16 10:24수정 2017-04-16 10:28

동물을 내세운 펠릭스 잘텐의 소설
아기 노루 밤비의 숲속 생활 그려
반유대인 정서 비판한 것으로 해석돼
시온주의 흔적도 곳곳에 배어 있어

개방적인 국제도시 빈과 달리
산업화 밑천 부족했던 독일 사회
‘이단적’ 화폐사상 꽃피우는 토양
히틀러에게 왜곡된 의식 심어주기도
펠릭스 잘텐의 원작을 토대로 1942년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속 한 장면. 잘텐의 원작에는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원작에 비해 밝고 평화로운 색조를 띠는 게 특징이다. 위키피디아
펠릭스 잘텐의 원작을 토대로 1942년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속 한 장면. 잘텐의 원작에는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원작에 비해 밝고 평화로운 색조를 띠는 게 특징이다. 위키피디아
[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⑧ <밤비>

“엄마, 이 오솔길은 누구 건가요?”

“우리 것이란다.”

아기 노루 밤비는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묻기를 좋아했다. “우리 둘 거예요?” “그래.” “우리 둘이만 쓰는 건가요?” “아니, 우리 노루들 것이란다.” “노루가 뭐예요?” “너는 노루고 나도 노루야, 우리 둘은 다 노루야.”

밤비의 눈망울에 비친 숲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곳엔 ‘날아다니는 꽃’(나비)이, ‘발굽 밑에서 떼지어 꿈틀대는 생명체’(개미)가, ‘팔딱팔딱 뛰는 풀조각’(베짱이)이 널려 있었다. 올빼미도 다람쥐도 풍뎅이도 고슴도치도 밤비의 친구였다. 개암나무, 산사나무, 층층나무, 딱총나무…. 날마다 아침 햇살이 황금빛 망사 모양으로 숲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탁 트인 초원 나들이에 처음 나서던 날, 엄마는 밤비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잠시도 엄마한테서 눈을 떼면 안 돼. 내가 땅에 넘어지는 걸 봐도, 뒤돌아보지 말고 곧장 달리기만 하는 거야. 약속하지?” 엄마가 밤비에게 일러주려는 건 바로 ‘위험’이었다. “지난해에 떨어진 죽은 낙엽들은 땅에 깔려 바삭바삭하는 소리로 위험을 경고해준단다.” 낙엽들은 죽어서도 계속 불침번을 서주다니 정말 고마운 존재구나, 밤비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린 밤비의 머릿속엔 위험이 무엇인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위험이란 아주 나쁜 어떤 것이야.’ 어린 밤비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펠릭스 잘텐(본명 지그문트 잘츠만)이 1923년 펴낸 <밤비>는 숲속을 노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하나둘씩 눈뜨는 사랑스런 아기 노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책은 원래 한 해 전인 1922년 8~9월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라는 신문에 연재되던 글을 단행본으로 묶어 낸 것이다. 주인공 밤비란 이름은 ‘아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밤비노에서 따왔다. 아기 노루 밤비가 태어나 뿔 달린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로 빼곡하게 짜인 이 책에 작가는 ‘숲속의 삶’이란 부제를 붙였다. 그에 딱 어울릴 만큼 숲속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을뿐더러, 밤비를 둘러싼 갖가지 생명체에 대한 세밀한 묘사도 탁월하다.

유대인 혈통을 지닌 펠릭스 잘텐은 청년 시절부터 유대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시온주의에 심취했고, 대표작 <밤비>에도 시온주의 메시지를 담았다. 위키피디아
유대인 혈통을 지닌 펠릭스 잘텐은 청년 시절부터 유대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시온주의에 심취했고, 대표작 <밤비>에도 시온주의 메시지를 담았다. 위키피디아

‘그’, 평화와 생명, 자연의 파괴자

물론 생명의 박동으로 가득 찬 숲속 세상이 항상 평화로운 건 아니다. 어느 날 밤비는 발 앞쪽에서 무엇인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실처럼 가는 비명이 들려왔다. 족제비가 생쥐를 날름 잡아먹은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나선 여우 한 마리가 잘생긴 수꿩을 순식간에 낚아채 갈기갈기 찢다시피 하는 광경이 밤비의 눈앞에 펼쳐졌다. 숲속의 삶이란 원래 그런 건가 싶었다. 어느덧 밤비도 아기 티를 벗고 제법 자란 터였다.

하지만 숲속의 평화를 깨뜨리는, 진짜 두려운 존재는 따로 있었다. 어느 날 밤비가 숲길을 지날 때였다. 저만치 떨어진 키 큰 개암나무 옆에 무엇인가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He)였다. 화들짝 놀라 한걸음에 도망쳐온 밤비를 앞에 두고 노루 무리는 저마다 ‘그’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는 길을 걸을 때 단지 두 개의 다리만 사용한다고들 했다. ‘그’는 세번째 손을 가졌다고들 했다. 누군가 물었다. “그럼 요란하게 뻥 하는 건 뭐지?” “그건 ‘그’가 ‘그’의 손을 찍어낼 때 나는 소리야. ‘그’의 손엔 불이 가득 차 있대.” 얼마 뒤 ‘그’가 숲속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숲속 친구들은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한순간 천둥소리와도 같은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그날 이후 밤비는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오래전 엄마가 가르쳐주려 했던 ‘위험’의 실체를, 밤비는 그제야 엄마의 목숨과 맞바꾸며 또렷하게 깨달았다.

1923년 출간된 <밤비>의 초판 사진. 나치 정권이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우면서 초판은 희귀본이 됐다. 위키피디아
1923년 출간된 <밤비>의 초판 사진. 나치 정권이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우면서 초판은 희귀본이 됐다. 위키피디아
<밤비>에서 숲속의 평온한 삶을 한순간에 망가뜨리는 건 외부인, 곧 ‘그’다. 아마도 총을 든 사냥꾼을 암시하는 ‘그’란 존재는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인간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장치다. 숲은 평화이자 생명이며 자연이고, ‘그’, 즉 인간은 평화와 생명, 자연을 짓밟는 파괴자다. 자연과 생명을 예찬하는 <밤비>를 두고 자연과 생명을 능멸하는 인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환경(생태)소설의 고전으로 해석하려는 흐름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밤비>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1933년, 그러니까 <밤비>가 출간된 지 꼭 10년 뒤 독일에서 벌어진 일을 보자. 그해 5월10일 독일학생연맹 소속 젊은이들이 도시마다 엄청난 양의 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독일인의 건전한 정신을 해친다는 이유를 끌어다 댔다. 그중엔 잘텐의 <밤비>도 포함됐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3월)하면서 나치 독재 기반이 확고해진 직후의 일이다. 이후 나치 정권은 <밤비>를 금서로 공식 지정했고,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엔 아예 씨를 말려버렸다. 자칭 ‘숲의 민족’이라는 독일인들은 왜 숲속의 삶을 그려낸 <밤비>에, 더군다나 ‘뿌리’가 같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어로 출간된 <밤비>에 그토록 적대적이었을까?

비밀을 풀 열쇠는 <밤비>를 지은 잘텐이란 인물이다. 현재의 헝가리 중부도시 페슈트 태생인 잘텐은 생후 3주 만에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비엔나)으로 이주했다. 이주 배경은 그들이 유대인 혈통을 지녔기 때문이다. 당시 빈은 중·동부 유럽 유대인 사회의 거점이다시피 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유대인에게 거주와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허용함에 따라, 빈은 유럽 각지에서 몰려드는 유대인으로 넘쳐났다. 10년 전 2000여명에 불과하던 유대인 수는 1860년대 말 4만명을 넘어섰고, <밤비>가 출간된 1923년엔 20만명을 웃돌았다. 잘텐은 가정 형편상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음에도 청년 시절 유대인 작가, 언론인, 예술가 등이 이끈 ‘젊은 빈’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큼 유대인 사회에 강한 소속감을 느꼈다.

화해의 가능성을 조롱하는 메시지

이런 개인적 배경 때문에 <밤비>엔 당시 기승을 부리던 유럽대륙의 반유대인 정서를 겨냥한 통렬한 비판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아기 노루 밤비를 비롯한 숲속의 친구들과 현실의 유대인은, ‘그’로 상징되는 외부인(타자)으로부터의 ‘박해’라는 연결고리로 한데 묶여 있다고 봐야 옳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우화의 형식을 띠었으나, 실제로는 삶의 터전에서 내몰릴 위험에 처한 유대인의 처지를 호소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작품인 셈이다. 마냥 ‘예쁜’ 책으로만 보이는 <밤비>가 권력을 장악한 나치 정권의 눈엣가시로 떠오른 건 당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꿈틀댄 반유대인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화폐관은 아돌프 히틀러의 머리에 그대로 이식됐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엔 이런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꿈틀댄 반유대인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화폐관은 아돌프 히틀러의 머리에 그대로 이식됐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엔 이런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위키피디아

1920~30년대에 두 이웃 나라에서 유대인 문제가 갈등의 도화선이 된 배경은 무엇일까? 20세기 초반만 해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위상은 꽤 차이가 났다. 찬란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을 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을뿐더러 문화적으로도 활기가 넘쳤다. 중심도시 빈은 국제도시란 이름에 걸맞게 대단히 개방적이었고,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았다. 금융시장 역시 발달했다. 유대인들도 빈이 번성하는 데 한몫했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중시하고 정부보다는 시장에 방점을 두는 자유주의 경제학이 유독 이곳에서 크게 융성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화폐도 시장거래의 자연스런 산물이라고 주장한 빈대학 교수 카를 멩거가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독일은 상대적으로 뒤진 상태였다. 특히 독일이 골머리를 앓은 건 화폐 문제. 후발 산업화의 밑천이 될 만한 자금은 늘 쪼들렸다. 더군다나 국제금융 질서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금본위제로 확실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패전국의 처지는 독일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지방정부들은 저마다 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국제적인 금융네트워크를 가진 유대인 금융자본을 끌어들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대인 금융자본의 영향력은 독일 사회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독일에 금(돈)은 한마디로 걸림돌이었다.

자연스레 독일에선 화폐에 관한 ‘이단적’ 사상이 꿈틀댔다. 금이 부족한 독일 입장에서 볼 때, 글로벌 스탠더드라 할 ‘돈=금’의 공식만 깰 수 있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는 법. 화폐란 가장 쓸모 있다고 시장이 인정한 물건(금)이 아니라 국가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화폐국정설’은 복음처럼 찾아왔다. 고트프리트 페더 같은 인물은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갔다. 기업가였던 페더는 유대인 금융자본이 챙기는 ‘이자’를 독일 사회를 갉아먹는 절대악이라 주장하며, <이자의 굴레로부터의 단절>(1919년)을 펴냈다. 이러한 반유대인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화폐관은 아돌프 히틀러의 머리에 그대로 이식됐다. 같은 해 독일노동자당(나치당의 전신) 창당에 관여한 페더는 히틀러를 끌어들였고, 몇해 뒤엔 대표작 <민족적·사회적 기반 위의 독일>(독일의 기반)을 펴냈다. <밤비>가 출간된 1923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의 요지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1925~26년)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수정의 밤’이라 불린 1938년 11월9일 밤, 독일 영토 전역에선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과 약탈이 자행됐다. 이날 밤 빈에서만 6000여명의 유대인이 잡혀갔다. 펠릭스 잘텐은 다행히 스위스 취리히로 몸을 피했고, 그는 이곳에서 <밤비>의 속편인 <밤비의 아이들>을 썼다. 위키피디아
‘수정의 밤’이라 불린 1938년 11월9일 밤, 독일 영토 전역에선 유대인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과 약탈이 자행됐다. 이날 밤 빈에서만 6000여명의 유대인이 잡혀갔다. 펠릭스 잘텐은 다행히 스위스 취리히로 몸을 피했고, 그는 이곳에서 <밤비>의 속편인 <밤비의 아이들>을 썼다. 위키피디아
다시 <밤비> 이야기로. 작가의 의도는 단지 유대인 박해를 고발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을 것 같다. 잘텐이 활동하던 당시 빈의 유대인 사회는 대체로 기독교 사회에 동화된 그룹과 유대교 전통에 충실하려는 그룹, 둘로 나뉘었다. 이 무렵 유대인들의 옛 터전인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세우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불붙었는데, 유대인 전통에 충실한 잘텐은 시온주의에 바짝 기댔다. <밤비>에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밤비의 사촌인 ‘고보’의 죽음을 묘사한 대목을 보자. 한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고보는 ‘그’와 함께 지낸 시간을 노루 무리에게 설명한다. “그때 ‘그’가 날 구해줬어. 난 이제 ‘그’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이제 난 ‘그’와 친구니까.” 얼마 뒤 숲속엔 ‘그’가 다시 나타났다. 천둥소리가 울렸고, 고보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고보의 울부짖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와 친구가 될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과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믿음을 조롱했다고나 할까. 이쯤 되면 <밤비>에선 외려 다분히 공격적인 정서마저 읽히기도 한다.

‘진주만 공격’의 비유로 해석되기도

<밤비>가 전세계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데는 1942년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 잘텐한테서 단돈 1000달러에 판권을 사들인 사업가로부터 영화 판권을 다시 넘겨받은 디즈니는 원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디즈니판 밤비’를 탄생시켰다. 영어판을 이어받아 밤비를 노루 대신 사슴으로 바꾸었고, 아기 토끼 섬퍼 등 원작엔 없는 등장인물을 창조해 훨씬 밝은 색조를 강조했다. 무엇보다 디즈니에 <밤비>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의미가 각별하다. 1930년대 들어 할리우드엔 유대인의 영향력이 부쩍 커졌는데, 디즈니는 메이저급으로는 유일하게 유대인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사였다. 그만큼 안팎의 압력도 거셌다. 디즈니가 상당한 공을 들여 <밤비>를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 데는 이런 사정도 숨어 있다. 특히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다. 나치즘을 겨냥한 <밤비>는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음에 틀림없다.(※1942년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됐을 때, 한편에서는 숲의 평화를 파괴하는 ‘그’의 출현을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기도 했다.)

<밤비>의 영어 번역서는 1928년에 나왔다. 옮긴이는 당시 미국공산당 당원이었던 휘터커 체임버스란 인물이다. 한동안 잊혔던 그의 이름은 정확히 20년 뒤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열렬한 반공투사로 변신한 그는 1948년 전직 국무부 직원 앨저 히스를 공산주의 첩자라고 고소한 장본인이다. 매카시즘 광풍의 전주곡을 울린 유명한 사건이다. 자연과 생명의 언어가 넘쳐흐르는 <밤비>. 반유대인 정서와 정면대결하려는 결의에 이어, 어쩌면 전체주의 비판의 싹도 찾아나서야 하는 걸까. 커다란 눈망울로 숲속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던 사랑스런 밤비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지우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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