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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가 함께 움직이는 곳에서 주체성 찾아야

등록 2017-07-27 19:58수정 2017-07-27 20:23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에 주목
자본주의 기계론적 구조 제대로 읽어야
혁명 위한 새로운 주체성 발견 가능
기호와 기계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신병현·심성보 옮김/갈무리·2만1000원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가 “자동차 산업이 새로운 자동차 라인을 출시하듯 새로운 주체성 모델을 출시한다”고 말한 바 있다. ‘주체성’의 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란 얘기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체제는 새로운 주체성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쪽 역시 ‘정치적 주체’의 발명을 가장 골치 아픈 숙제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출신 자율주의 이론가 마우리치오 라차라토는 <부채인간>(한국어판 2012)에서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따라 ‘부채인간’이라는 억압적이고 퇴행적인 주체의 형상이 불거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기호와 기계>에서 라차라토는 자본주의의 주체성 생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이른바 ‘비판이론’들이 그 핵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율주의의 이론적 전통에 충실하게 지은이는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 가타리 등 프랑스 탈근대 철학을 주로 활용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기계’, ‘비기표적 기호’ 등 가타리가 제시한 개념틀에 특히 집중한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마우리치오 라차라토. 갈무리 제공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마우리치오 라차라토. 갈무리 제공
지은이는 먼저 자본주의가 주체성을 생산하는 구조가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 두 가지의 권력장치가 함께 작동하면서 주체성을 만들어낸다. 사회적인 복종이 우리에게 성, 신체, 직업, 민족성 따위의 특정한 정체성을 할당해 이분법에 기반을 둔 ‘개체화된 주체’를 만들어낸다면, 기계적인 예속은 인간은 물론 비인간적인 요소들을 시스템의 부품들처럼 ‘배치’해 관리·제어한다. 개인이나 인권, 시민사회, 정치적 대표, 이데올로기와 억압 등이 사회적 복종에 해당한다면, 기계적 예속은 주가지수, 통화, 방정식, 다이어그램, 컴퓨터 언어, 국민 계정, 기업 회계 같은 것들이다.

예컨대 자동차를 움직일 때 우리는 우리의 주체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자동차의 기술적 메커니즘과 연결된 다양한 부분적 의식을 활성화한다. “이 버튼을 누르세요”, “이 페달을 밟으세요”라고 말하는 ‘개체화된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주체가 수많은 부분들로 분해되어 자동차 부품들과의 네트워크 아래 저절로 작동한다. 인간과 자동차를 분해해 그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기계적 예속 자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사회적 복종에 해당하는 ‘개체화된 주체’의 사유와 의식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작동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기계적 배치의 전체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자동차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지은이가 특히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동안 비판이론들은 사회적 복종이란 주제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기계적 예속의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와 그 비판자 모두 주체성 발명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언어를 주된 수단으로 삼아 인간중심적으로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려 했던 접근 방식이 있다고 한다. 언어처럼 인간의 의식에만 대응하는 ‘기표적 기호계’로는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기계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지은이는 인간의 의식 수준에 갇히지 않는 ‘비기표적 기호계’라는 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자동차 운전에서 보듯, 현실에서는 기표적 기호계와 비기표적 기호계가 나뉘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혼합적 기호계’로서 뒤섞여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1868년 독일 켐니츠의 작센 마시넨파브리크 공장의 모습. 기계는 인간·비인간 요소의 배치를 통해 움직인다. 갈무리 제공
1868년 독일 켐니츠의 작센 마시넨파브리크 공장의 모습. 기계는 인간·비인간 요소의 배치를 통해 움직인다. 갈무리 제공
지은이의 분석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를 어떻게 새롭게 발명할 수 있는가로 향한다. 거칠게 정리하면, 사회적 복종에만 대항해 민주주의에 근거한 평등을 요구하는 차원에 멈춰 있을 것이 아니라, 기계적 예속에까지 대항해 인간중심주의에서 탈피한 새로운 주체성을 발명할 수 있는 실존 양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치적 행동은 노동의 사회적 분할에 따라 특정한 지위와 역할을 할당하려는 사회적 복종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정치적 행동은 기계적 배치, 달리 말해 세계와 그 가능성을 구축하고 문제화하며 변형해야 한다.” 기계론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파악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다만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진 않다.

반면 기존 비판이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크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대한 비판이다.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이 평등을 쟁취해내는 것을 정치의 핵심으로 본다. 랑시에르와 “좌파 일반”에 대해, 지은이는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비판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전망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치적 공론장에서의 언어(랑시에르), 생산(인지자본주의), 주체의 구축(지제크와 버틀러) 등 실존이 아닌 담론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몫 없는 이들’이 평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증명이나 논쟁, 대화 등 언어적인 ‘재현’을 통해 인정과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권력의 관점을 재생산할 우려가 있다고도 지적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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