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지배와 억압을 없애기 위한 ‘차이의 정치’

등록 2017-09-28 19:50수정 2017-09-28 20:12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영
동일성·보편주의 정의론 비판
지배받고 억압받는 집단에
‘차이의 정치’로 이론적 틀 제공
차이의 정치와 정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 지음, 김도균·조국 옮김/모티브북·3만원

존 롤스는 모두에게 불편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확보하기 위해 ‘원초적 입장’이란 걸 가정했는데, 당사자들이 서로의 개별적인 배경을 알 수 없도록 하는 ‘무지의 베일’을 쓴다는 것을 그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전혀 알 수 없는 당사자들은 과연 진정한 토론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실제 현실은 이런 정의의 원칙에 과연 얼마나 제대로 반영될까?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의 주저 <차이의 정치와 정의>(1990)는 기존 정의론과 정치철학 담론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차이의 정치’를 새롭게 제기하는 책이다. 90년대까지 사회운동의 흐름을 섭렵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명저로 손꼽혀왔으나, 국내에선 법학자인 김도균·조국 서울대 교수의 번역에 힘입어 이제야 출간됐다. 영의 또 다른 저작으로는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이후, 2013)가 국내 출간된 바 있다.

영은 “이 책의 철학적 출발점은 사회적 지배와 억압에 관한 주장들”이라고 말한다. 60~70년대에 정점에 달한 ‘복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각종 지배와 억압에 맞서 인종차별 철폐, 여성·동성애자·장애인 해방 등을 주장하는 사회운동들을 불러일으켰다. 페미니즘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의 문제를 인식한 영은 점차 다른 집단들의 사회운동 현실에도 참여하며 자신만의 사유를 갈고닦았고, 이 책에서 그런 사회운동들에 철학적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구조적 억압과 지배를 문제 삼는 정의론을 주창했다. 출처 게티이미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구조적 억압과 지배를 문제 삼는 정의론을 주창했다. 출처 게티이미지.

서문에서 영은 ‘환원주의’, 곧 “정치적 주체들을 하나의 단일체로 환원하고, 특이성과 차이보다는 공통성과 동일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근대 정치 이론의 경향”을 비판의 주된 과녁으로 제시한다. 그 첫번째 작업은 ‘분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류 정의론을 논파하는 것이다. 그가 볼 때 자유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관점을 막론하고 기존 정의론들은 한결같이 재화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논의하는 데에만 머물렀다. 영은 분배의 중요성을 외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정의의 문제가 분배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관심을 분배 그 자체로부터 분배 문제가 배태되고 창출되는 과정, 즉 무엇이 분배될 재화인지 지명하고, 재화의 의미를 부여하며, 재화를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옮기는 것”(마이클 왈저), 곧 분배를 수행하는 구조적·제도적 맥락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의 목표다. 권리나 기회, 자존감 등 비물질적 재화로까지 그 대상을 확장하더라도, 분배 패러다임은 이런 구조적·제도적인 맥락을 당연시하고 은폐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구조적 억압과 지배를 문제삼는 정의론을 주창했다. 출처 게티이미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구조적 억압과 지배를 문제삼는 정의론을 주창했다. 출처 게티이미지

구조적·제도적 맥락으로 눈을 돌리면, ‘지배’와 ‘억압’이라는 부정의가 존재하는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 지배는 개인들의 ‘자기 결정’을, 억압은 개인들의 ‘자기 발전’을 막는 제도적인 제약이다. 그리고 대개 억압은 지배를 수반한다. 지배와 억압이라는 구조적·제도적 부정의를 인식하는 것은 분배의 문제를 포괄할 뿐 아니라 분배의 논리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의사결정 절차, 노동 분업, 문화의 문제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영은 착취, 주변화, 무력함, 문화제국주의, 폭력이라는 다섯가지 억압의 범주를 제시하고, 이것들이 복잡하게 중첩되어 나타나는 현실을 짚는다. 그리고 지배와 억압을 최소화시키는 것, 곧 ‘자기 결정’과 ‘자기 발전’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정의의 요소이자 조건”이 된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집단’에 대한 고찰이다. 영은 기존 정치철학이 개별화·원자화된 개인만 논의할 뿐 집단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고 비판하는데, 그에 따르면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이 개인을 구성한다.” 여기서 집단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사회관계의 형식이며, “한 사회집단을 정의하는 것은 그 집단이 공유하는 속성들이 아닌 정체성의 감각”이다. 집단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집단 간의 차이가 억압을 불러오는 현실 때문이다. 억압은 “어떤 집단을 무력화하거나 폄훼하는 구조적 현상”이다. 근대의 주류 정치철학은 동일한 ‘시민 공중’으로서 모든 주체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불편부당’한 정의관을 찾는 데에 골몰했다. 그러나 이는 특권 집단의 개별특수적인 경험과 시각을 보편적인 것인 양 전제로 삼는 대신, 그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다른 집단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성운동을 비롯한 각종 신사회운동들은 그런 ‘환원주의’ 정의론과 정치철학의 부조리를 뚫고 나와, 피억압 집단들이 현실에 저항하며 나타난 움직임이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 <한겨레> 자료사진

이 때문에 영은 집단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로 이들에게 이론적 기틀을 제공한다. “동화주의 이상은 모든 사람을 위해 평등한 사회적 지위란 모든 사람을 동일한 원칙, 규칙, 기준에 따라 취급하는 것이라고 상정한다. 반면 차이의 정치는 평등을 모든 집단이 참여하는 것이자 모든 집단을 포용하는 것으로 파악하며, 때때로 이런 평등은 피억압 집단 또는 불이익을 받는 집단을 위한 별도의 조치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차이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영은 ‘적극적 차별시정조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피억압 집단의 목소리를 특별히 보장하는 ‘집단 대표제’ 같은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필연적으로 이방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조건을 지닌 ‘도시 생활’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이상을 탐색하기도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