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향수
-근대 한국과 러시아 문학, 1896~1946
김진영 지음/이숲·2만5000원
1896년 고종의 특명을 받은 민영환은 사절단을 이끌고 여러 나라를 거쳐 러시아를 방문했고, 당시의 기록을 담은 <해천추범>은 조선의 첫 공식 서양 여행기가 됐다. 사절단은 페테르부르크에서 근대화를 이뤄 ‘서양’이 된 러시아의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며 그 위에 장차 근대화될 조선의 미래를 그렸다. 그로부터 꼭 50년 뒤인 1946년,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선 소설가 이태준은 사회주의 혁명을 찬탄하며 <소련기행>를 남겼다. 이처럼 러시아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길목마다 어떤 ‘유토피아’처럼 자리를 잡고 지식인들의 정신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러시아문학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가 최근 펴낸 <시베리아의 향수>는 근대 한국과 러시아 문학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천착한 책이다. 25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지금 러시아는 ‘제3세계’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제1세계’였다”고 말했다. 이광수를 비롯한 근대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고, 술에 취하면 러시아어로 떠들어대곤 했다. 카츄샤와 나타샤, 쏘냐는 순이만큼 친숙한 이름이었고, 시베리아는 향수의 대상이요 실제로 이들이 방랑한 무대였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유토피아로서, 어떤 ‘모델’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해천추범>과 <소련기행> 사이에는 50년이 흐르고 제정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었지만, 그 맥락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봅니다.”
25일 오후 연세대 외솔관 연구실에서 만난 김진영 교수는 “문학을 공부할수록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 시대를 보는 텍스트로서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러시아 문학을 통해 근현대 우리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왜 러시아였는가? 김 교수는 “한반도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가까운 서양의 세계였으며, 그러나 다른 서구 열강과는 변별되는 ‘대안’으로서의 이국이었다. 중국 대륙과 겹쳐지는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동양(중국·일본)이 지배하는 만주와 엄연히 차별되는 자유와 방랑의 대지”였다고 말한다. 비교적 안전한 ‘제3지대’ 같은 느낌을 준 것이다. 또 러시아는 19살의 나이로 시베리아로 훌쩍 떠났던 백신애, 영화인 나운규, 이광수 등의 경우처럼, 절망에 빠진 식민지 젊은이가 맨몸으로 ‘방랑’을 찾아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곳엔 위대한 문학과 혁명이 있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러시아 문학 수용 태도가 달랐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일본의 경우 강자, 곧 제국주의 입장에서 러시아 문학을 읽은 반면, 한국과 중국은 약자의 입장에서 읽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두 문호,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수용하는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에 심취했던 일본 지식인들은 주로 ‘형이상학적 절대’와 그를 초극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도스토옙스키를 대체로 “고통받는 약자들의 영혼을 파헤친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했다. 톨스토이의 경우 한국과 중국에선 주로 “부유한 자의 폭력을 미워하고 가난한 자의 고통에 울던 민중 작가로서의 면모가 강조됐다.”
이러한 ‘선택적’ 수용의 배경에는 식민지배와 가난 등 당시의 절박한 현실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사실, 가난과 지식인의 비애를 다룬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와 ‘노동자와 흰 손’이 높은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 등도 이런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절박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 근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있는 그대로’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러시아란 유토피아를 그렸고, 또 그 원하는 바에 따라 러시아 문학을 선택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과 소비에트 연방을 보는 눈에도 거의 같은 조건이 작용했으며, 이는 결국 <해천추범>에서 <소련기행>에 이르는 50년을 관통한다. 김 교수는 “문학을 공부할수록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 시대를 보는 텍스트로서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한국의 근현대와 러시아 문학을 연결하는 일은 결국 ‘우리’를 알기 위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베리아 평원에 강이 흐르고 있는 모습.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은 남아 있지만”, 과거 지대했던 러시아 문학의 영향력은 이제 많이 사라진 상태다. 그 주된 이유는 단연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인한 분단과 그 이후 미국과 서구 자본의 영향”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이번 책은 해방 공간까지 다뤘지만, 애초 계획은 분단 뒤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80년대까지 소련에 대해 ‘억압된’ 동경 같은 심성을 가졌던 한국 지식인들은, 개혁·개방과 소련의 해체를 겪으며 러시아·소련에 대해 또 한 차례 큰 반응을 보였다. 일제시대 갈 곳 없는 지식인들이 훌쩍 시베리아로 떠났듯 러시아로 ‘방랑’을 떠난 사람(윤후명의 <하얀 배> <여우사냥> 등)이 있는가 하면, 백무산·황지우·김정환 같은 이들은 소련의 배신에 대한 절망과 울분을 주로 표출했다고 한다. 여기에 고려인 문학, 북한 문학이라는 퍼즐까지 모으면, “현대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라는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기대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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