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지음, 고광열 옮김/사계절·1만8000원
러시아혁명 100년을 맞이한 세밑에 또 한 권의 주목할 만한 러시아혁명사 책이 나왔다. 이른바 ‘2세대 수정주의’ 경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쉴라 피츠패트릭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의 <러시아혁명 1917-1938>이다. 이 책은 1982년 처음 출간됐고 국내에도 1990년 번역 출간(대왕사)된 바 있으나, 이번에 나온 책은 2017년 개정 출간된 4판 편집본을 번역했다. 개정의 배경에는 소련 해체 뒤 ‘러시아 문서보관소’ 자료들의 발견과 이에 근거해 더 정교해진 서양 학계의 연구 성과가 있다. 지은이는 4판 서문에서 “1991년 이후 이용 가능해진 새로운 사료와 최근의 국제 학계 연구를 포함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책의 주장이나 구성에 주요한 변화는 없다”고도 밝힌다. 애초 스탈린 체제에 대해 기존과 다른 풀이를 내놓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혁명 기간을 1917년부터 ‘대숙청’ 기간을 포함하는 1938년까지로 길게 늘려잡았던 자신의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지은이가 스스로 꼽아보듯, 10월혁명 이후 ‘네프’(NEP·신경제정책), 네프를 끝낸 스탈린 체제, 스탈린 체제의 정점이었던 대숙청 등 세 가지는 러시아혁명의 기간을 설정하고 성격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논쟁적인 쟁점들이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스탈린 체제의 ‘위로부터의 혁명’은 단지 상층 지도부의 일탈이나 배반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뒀으며, 그런 점에서 “레닌의 혁명과 스탈린의 혁명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냉정한 지적이다.
러시아혁명을 읽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쉴라 피츠패트릭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 유튜브 갈무리
10월혁명에 이어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곧 “행정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이라는 국내 문제에 직면했다.” 1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도 가라앉아, 소비에트 체제는 동반자 없이 남겨졌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자본 축적을 위한 ‘전략적 후퇴’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부문을 허락하는 등 ‘신경제체제’를 도입했다. 여기엔 옛 부르주아 전문가와 소자본가가 필요했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짧은 ‘황금시기’로 바라보지만, 지은이는 훨씬 더 복잡했던 현실을 지적한다. 네프는 당시 혁명 지도부와 대중에게 ‘반동’의 불안을 안겨줬던 것이다. “혁명과 내전의 경험으로 주조됐고 스스로를 여전히 ‘무장한 노동계급’으로 여긴 1920년대의 젊은 공산당에게는 평화가 너무 일찍 찾아왔던 것이다.”
이는 네프를 철회하고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노정을 다시 다잡은 스탈린 체제로 이어졌다. 레닌의 혁명이 잠시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을, 스탈린 혁명이 원래 궤도로 올려놓은 셈이다.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소자본가들은 축출당했고, 국가는 다시 경제를 장악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농촌의 대대적인 집단화를 근대화·공업화의 기틀로 삼고자 했다. 경찰력은 크게 강화됐고, ‘계급의 적’은 ‘굴라크’(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시기에 스탈린 시기 소련의 특징이 될 닫힌 국경, 포위 심성, 문화적 고립이 확립되었다.”
특히 지은이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단지 ‘위로부터의 혁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후부터 노동자계급에서 당원들을 모집하고 이들을 꾸준히 사무·행정·관리직으로 보내는 등 ‘프롤레타리아 발탁’을 이어왔다. 스탈린 체제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노동계급의 ‘상향이동’이 더욱 급격하게 늘었다. 1933년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만1000명 가운데 6분의 1이 넘는 14만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명이었다. “스탈린 체제에서 중요했던 쪽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 출신, 즉 관리직 및 전문직 엘리트 안에서 새로 발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추’였다.”
1937년 모스크바를 지나는 백해 운하 옆을 걷고 있는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 간부들. 니콜라이 예조프(맨 오른쪽)는 ‘대숙청’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나 끝내 그 자신도 숙청되었고, 공산당은 사진 속에서 아예 예조프의 흔적을 지워버린 바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판 테르미도르(반혁명)’란 말을 써가며 스탈린이 ‘혁명을 배반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관점으로 보면, 혁명의 엔진을 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혁명의 적’을 찾아내고 공격하는 이 ‘새로운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야말로 혁명의 가장 큰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혁명적 테러’의 마지막 발작이었던 1937~1938년의 대숙청이야말로 러시아혁명의 ‘완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 참여가 없었다면 대숙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냉소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눈으로 혁명의 본성, 특히 부정할 수 없는 ‘혁명적 테러’의 에너지를 응시한다. 그리고 “좋든 싫든 러시아혁명은 20세기를 형성한 경험 중 하나”이며, 그것의 유산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곱씹고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지적한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했다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이를 제대로 기념하지 않았던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렇게 반문한다. “하지만 22세기에 혁명 200주년이 다가올 때 러시아와 전 세계에서 러시아혁명과 혁명의 사회주의적 목표가 얼마나 각광받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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