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서 기획한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한·중·일 행사 및 백두산 인문 기행’ 참가자들이 지난해 12월30일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산에 있는 윤동주 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룽징)시에 병풍처럼 자리잡은 동산(東山)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젊은 시인 윤동주의 묘지도 여기에 있었다. 2017년을 떠나보내기 직전인 12월30일 오전,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주최한 여행단 3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딱 100살 생일을 맞았을 날이라, 맑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행단의 마음속에는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불과 4~5m 거리를 두고, 고종사촌으로서 윤동주와 삶과 죽음을 함께했던 ‘청년문사’ 송몽규의 무덤이 있었다. 윤동주의 장례식(1945년 3월6일) 바로 다음날 세상을 떠난 그는, 윤동주와 삶과 죽음을 함께한 단짝이었다. 오가는 발걸음 드문 스산한 언덕에서 여행단은 머리를 숙여 한마음으로 두 청년을 추모했다.
용정시 용정중학교 옆에 조성된 윤동주 관련 전시관과 그 앞에 세워진 시비. 최원형 기자
전날 방문한 명동마을에서 시인의 탄생과 어린 시절 발자취를 더듬었던 여행단은, 용정 시내에서 시인의 청소년 시절 흔적을 더듬었다. 윤동주가 15살 때인 1931년 그의 일가는 그가 태어난 명동마을을 떠나 용정으로 이사했고, 그는 이곳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여행단이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춘 곳은 그가 살았던 집터로 추정되는 건물의 뒤뜰. 장례식 사진과 옛 주소 등을 바탕으로 집터로 추정하는 이곳에는 별다른 기념물이나 표지도 없이, 누군가 살고 있는 판잣집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나마 ‘용정 윤동주연구회’가 판잣집 앞 땅을 사두어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다고 했다. 여행단에 참가한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윤동주는 이 집에서 상당히 많은 시를 썼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용정시내 집터로 추정되는 곳의 현재 모습. 용정 윤동주연구회에서 이 땅 일부를 매입해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다고 한다. 최원형 기자
용정을 상징하는 용두레 우물, 윤동주가 다녔던 옛 대성중학교 터(현재는 용정중학교) 등도 돌아봤다. 일제의 만주 침략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옛 일본간도총영사관 건물 역시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북간도 지역에서도 용정은 특히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조선인 중심의 항일운동을 경계한 일제가 행정적 중심도시인 연길이 아닌 이곳에 수뇌부를 설치한 것이다. 옛 대성중학교 터에 조성된 항일운동 전시관과 ‘서시’ 시비 등에서 당시 대륙으로까지 뻗치던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 어렵사리 민족정신을 이어갔던 조선인들의 삶과, 이를 요람 삼아 자라난 윤동주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여행단이 명동마을에 복원된 명동소학교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윤동주는 외삼촌인 김약연이 세운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제공
윤동주를 기리는 여행은 30일 저녁 한·중·일 사람들이 어우러져 윤동주의 삶과 시를 되새긴 집담회에서 절정을 이뤘다. 연변 재중동포 사회에서 윤동주는 비교적 ‘늦게’ 발견됐지만, ‘민족’의 말과 정신을 되새긴다는 차원에서 윤동주 기념사업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조선족자치주 정부 차원에서 거액을 들여 명동마을 윤동주 생가를 기념공원처럼 조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재중동포 중학생 대상의 유일한 우리말 잡지인 <중학생> 주필을 맡고 있는 오경준씨는 “2000년 처음 시작한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을 18년 동안 한 회도 끊김없이 이어왔다”고 소개했다. 지난해에는 윤동주 탄생 100년을 맞아 1회 때부터의 우수 작품들을 한데 묶은 작품집도 펴냈다.
2017년 12월30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주최한 ‘윤동주와 그의 시대’ 집담회에서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윤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제공
여행단에 참여한 요시카타 베키 서울대 선임연구원과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과 시가 어떤 울림을 주고 있는지 소개했다. 일본어 번역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서시’)을 “모든 살아 있는 것”으로 잘못 옮기는 등 일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오역에 대한 지적, 외면해온 역사 문제를 자연스럽게 자각하게 만드는 문학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왔다. 김응교 교수는 ‘동주, 그는 무엇을 사랑했나’란 제목으로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해 강연을 펼쳤고, 평화를 노래하는 가수 홍순관은 ‘십자가’를 비롯해 윤동주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을 열창했다.
윤동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북간도, 평양, 서울, 도쿄, 교토, 후쿠오카 등 다양한 곳에 발자취를 남겼지만, 머물렀던 모든 곳이 ‘남의 나라’였다. 또 그의 흔적은 중국과 북한, 한국, 일본에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윤동주를 온전히 기리는 작업 자체가 ‘나라’를 뛰어넘지 않고선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중·일 3국에 모두 시비가 있는 시인은 윤동주가 유일하다”는 김응교 교수의 말대로, 윤동주란 시인의 의미가 그동안 막연히 알았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연변/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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