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철학입문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서광열 옮김/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1만8000원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보리스 그로이스(71)는 옛 소련 관료였던 아버지가 근무한 독일 동베를린에서 태어났고, 레닌그라드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1981년 서독으로 이주하면서 이른바 ‘서방 생활’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미국 뉴욕대 석좌교수로 있다. 그동안 국내에선 전문 분야인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 미학 또는 예술 비평에 중점을 둔 그의 책들이 주로 소개된 바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반철학 입문>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독특한 영역에 발을 담그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까다로운 역설과 모순을 즐기는 독특한 그의 사유 세계 전반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각 장마다 쇠렌 키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로부터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매클루언, 리하르트 바그너, 에른스트 윙거 같은 예술가까지 다양한 인물을 파고든다. 러시아 출신 철학자 레프 셰스토프, 알렉상드르 코제브, 극작가 미하일 불가코프 등 친숙하지 않은 인물들도 있다. 여러 시기에 걸쳐 썼던 에세이들을 묶은데다가, 이들 개개인에 대한 다양하고도 세세한 논의들이 체계 없이 제시되기 때문에 지은이의 논의를 일일이 따라가긴 버겁다. 다만 이들을 관통하는 ‘반철학’이라는 큰 주제,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서문에서 지은이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주목해볼 수 있다.
보리스 그로이스는 현대 예술과 철학에 대해 전복적인 ‘사고 실험’을 내놓고 있는 러시아 출신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다. 사진 마누엘라 쾰케. 출처: 유럽대학원(EGS) 누리집
지은이는 ‘진리란 것은 없다’는 목소리와 ‘진리가 너무 많아 넘쳐흐를 지경’이라는 서로 모순된 목소리가 겹쳐서 울려퍼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철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흔히 철학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 가려진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라 여겨지지만, “우리는 모든 비판적 관점이 정치, 예술 또는 올바른 섭생의 영역에서 대중을 단순히 당황하게 만들며 대중들에 의해서 거의 반사적으로 거부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파는 수많은 진리들을 비판으로 깨부수며 ‘언젠가 진짜 진리를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철학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런 “철학적 비판은 각 진리를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로 인해 진리를 불신하게 되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이런 희망과 실망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은이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제안한다. 진리를 끊임없이 따져보는 것을 중단하고 단순히 ‘선택’해서 실천한다면, 아예 진리의 ‘상품성’ 자체를 박탈할 수 있지 않을까? 지은이는 ‘예술’을 뒤집었던 ‘반예술’ 개념에 착안해, 이런 철학적 전환에 나름대로 ‘반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세계를 설명하지 말고 변화시키라”는 마르크스의 경구처럼 반철학은 ‘진리를 비판하지 말고 진리를 실행하라’고 명령한다. 명령이 실행될 때에야 비로소 진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때문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철학적 비판에 선행하는, 명령을 수행할 결심 그 자체다.
보리스 그로이스는 현대 예술과 철학에 대해 전복적인 ‘사고 실험’을 내놓고 있는 러시아 출신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다. 출처: 이플럭스(e-flux) 누리집
다만 반철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지은이 스스로도 “에세이 자체가 특히 어떤 지침도 주지 않기 때문에 실망스러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은이가 두서없이 제시하는 다양한 ‘반철학자’들의 삶과 사유에서는 어떤 공통된 태도 같은 것을 발견해낼 수 있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는 외부 세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이성이 내부적으로 인간을 속박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성이 자명하다고 판단한 모든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다. 셰스토프는 근대를 점령한 이성이 사실은 현실과 자연법칙에 굴복했다고 보고, 체계에 대한 관심을 버린 채 극단적인 일상의 언어로 개별적 인간의 운명에만 집중했다. 자크 데리다는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비판을 계몽 전통의 연속으로 파악하는 등 ‘계시 없는 계시’의 역설을 드러냈다.
발터 베냐민은 오지 않는 희망을 기다리는 철학의 편에 서는 대신 잃어버린 진리를 재생산하는 신학에 몰두했는데, 그의 사유는 대량 복제를 가능하게 만든 근대의 세속적 세계와 철학의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 되새기게 만든다. 이에 대한 논의는 극작가 에른스트 윙거, 러시아 출신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에 대한 에세이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된다.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꼽는다면, 한 시대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기 마련인 매끄럽고 모순 없는 헤게모니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의 사유를 ‘비판’이 아닌 ‘명령’으로서 제기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 중심에는 삶 그 자체와 불투명한 진리 사이에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내적 세계에서도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자신의 사유가 야기하는 모순과 역설까지도 껴안는 태도가 있다. 서문에서 지은이는 자신의 입장이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그것은 “주체가 생존의 문제를 포함하여 자신의 고유한 삶의 관심으로부터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고, 경험적 자아의 고민에 의해 더 이상 제한되지 않는 세계관의 한 지평을 여는 것에서 성립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진리의 상업화와 인플레이션 현상이 만연한 시대에, 지은이가 말하는 반철학은 우리의 시야를 한정된 텍스트로부터 무한한 삶 그 자체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독자들은 더이상 텍스트를 진리가 발생하거나 드러나는 장소로 여기지 않는다. 텍스트가 사유보다 행동이 요구되는 독자들을 위한 지침들의 총계로만 간주된다면, 독자들이 이 지침들을 통해 삶의 태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과 양식이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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