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4-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박구병 옮김/까치·2만5000원
<근대세계체제>는 ‘세계체제’(‘세계체계’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라는 독특한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인 체계로 파악해온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87)의 대표 저작이다. 페르낭 브로델에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에릭 홉스봄에게 ‘시대’ 시리즈가 있다면, 월러스틴에게는 이 <근대세계체제> 시리즈가 그의 삶과 연구를 관통하는 저작으로 꼽힌다. 1974년 처음 1권을 펴낸 뒤 80년대에 걸쳐 3권까지 펴냈던 월러스틴은, 3권이 나온 지 무려 22년 만인 지난 2011년 4권을 펴낸 바 있다. 이 4권이 박구병 아주대 사학과 교수의 번역으로 지난해 11월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전체 저작은 근대세계체제의 역사적, 구조적 발전을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먼저 4권 서문에서 1~3권까지의 흐름을 월러스틴 스스로 정리해둔 대목을 참조해보면 좋겠다. 월러스틴은 ‘18세기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됐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6세기로부터 근대세계체제의 시초를 찾는다. ‘장기 16세기’를 다루는 1권은 근대세계체제의 탄생과 이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정치·경제적 제도 가운데 일부가 어떻게 출현했는지 살핀다. 이 시기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태동했으나, 서유럽과 아메리카 일부에서만 존재했다. 2권은 흔히 ‘재봉건화’ 또는 ‘후퇴’의 시기로 인식됐던 17세기가 사실은 세계경제의 통상적인 침체 국면으로서, 이 시기 ‘세계경제’는 오히려 공고화됐다고 본다. 1730~1840년대를 다루는 3권은 러시아, 인도, 오스만 제국, 서부 아프리카 등의 거대한 지역들의 근대세계체제 편입 등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경제적·지리적 팽창을 다룬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974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근대세계체제’ 3부작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로서 ‘세계체제론’을 제시한 바 있다. 출처 월러스틴 누리집.
애초 이와 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4권에서 ‘장기 19세기’를 다루려 했던 월러스틴은, 4권의 중심 주제를 결정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핵심적인 사건은 프랑스 혁명이 근대세계체제 전체에 제공한 문화적 결실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미 16세기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태동해 그 뒤로 꾸준히 확장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월러스틴에게, 이 시기의 핵심을 산업혁명, 민중혁명, 또는 이들이 결합해 생성된 ‘근대성’ 등으로 파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19세기의 정신과 구조를 지배한 어떤 것에 주목했다. 프랑스 혁명 등으로 태동한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끝내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길들이고 근대세계체제에서 단 하나의 주역이 된 “중도적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제이다.”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월러스틴이 말하는 “세계체제의 ‘지문화’(geoculture)의 출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문화란 “세계체제 전체에서 널리 수용되고 그 뒤 사회적 행위에 제약을 가한 일련의 사상, 가치, 규범을 일컫는다.” 애초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던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 위치해, 이들을 길들이며 체제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 이미 꾸준히 팽창하고 있던 근대세계체제는, 지문화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지평에 힘입어 더욱 공고하게 제자리를 굳혔다. 이것이야말로 프랑스 혁명이 근대세계체제에 끼친 ‘문화적’ 영향이었다. 월러스틴은 “개인주의라는 양의 가죽을 쓴 강력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의 속성, 영국과 프랑스의 헤게모니 싸움이 결과적으로 유럽에 ‘자유주의 국가’ 건설을 야기한 맥락, 포함에서 배제로 시민권의 원칙을 바꾸려 했던 시도와 갈등, 지배 집단의 통제 수단으로서의 역사적 사회과학의 출현 등을 논한다.
1974년 발간됐던 ‘근대세계체제’ 1권의 표지.
애초
4권에서 다루고자 했던 내용들을 5권으로 미뤄뒀기 때문에, 아프리카 쟁탈전과 민족해방운동의 부상, 영국의 뒤를 이어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려는 미국과 독일의 경쟁과 미국의 최종 승리, 동아시아의 편입과 주변부화, 그리고 20세기 말 동아시아의 부활 등의 내용은 앞으로 나올
5권에 실릴 전망이다. 고령의 월러스틴이 과연 언제까지 집필을 계속할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오지만, 월러스틴 스스로는 6권의 집필 계획까지 밝혔을 뿐 아니라 “어쩌면 심지어 7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한다. 6권의 주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로서, 그것이 다루는 범위는 1945/1968년부터 21세기 중엽, 예컨대 2050년쯤까지일 것이라 한다. 과연 2050년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 이르러 있을까. ‘한 체제의 생성이 있다면 소멸이 있다’는 월러스틴의 신념은 확고해 보인다. “근대세계체제는 그 결정적인 소멸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고 알 수도 없으며, 그 특성을 우리가 아직은 윤곽조차 잡을 수 없는 후계자 또는 후계자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될 것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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