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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선비의 답안지로 조선시대를 읽다

등록 2018-03-29 20:46수정 2018-03-29 20:53

선비의 답안지
김학수 외 지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1만6000원

조선시대 시권-정서와 역주
김학수 외 지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5만원

조선 현종 때 증광문과 시험에 나아간 박세당(1629~1703)은 국가 재정 운영의 원칙을 묻는 문제를 만났다. 그는 답안에 “백성이 풍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썼다. 왕실의 축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는 ‘하찮은 세금일지라도 전부 재정 담당 부서가 관장해 왕실의 간섭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고도 했다. 왕의 입장에서 언짢을 수도 있을 법한 답이었지만, 박세당은 장원으로 합격했다. 과거 시험이 단순한 ‘글잔치’가 아니라 국가 경영의 현안을 치열하게 주고받는 자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과거제도는 신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능력사회’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조선 사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어주는 제도다. 과거시험에서 작성한 문장(‘제술’)과 그 채점 결과(‘강지’)를 담은 ‘시권’은 이 같은 과거 제도의 다양한 면모를 잘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최근 각종 시권류 67종, 문집에 수록된 대책류 23종을 합해 전체 90종의 시권을 역주한 <조선시대 시권-정서와 역주>와, 시권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담은 책 <선비의 답안지>를 함께 펴냈다.

정조의 친시에 나아간 다산 정약용의 시권 ‘오객기’. 다섯 종류의 새를 소재로 삼아 인재 등용의 방향을 논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정조의 친시에 나아간 다산 정약용의 시권 ‘오객기’. 다섯 종류의 새를 소재로 삼아 인재 등용의 방향을 논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과거시험을 내용별로 구분하면 제술과 ‘강경’(경서 암송)으로 나뉘는데, 강경은 꽤 드물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시험을 본 뒤 응시자들은 최종 합격자 명단을 게시하는 ‘출방’을 애태우며 기다리는데, 출방하면 응시자가 제출했던 원본 답안지와 베껴 적은 답안지를 모두 돌려받았다. 합격한 이들이 마냥 즐거울 것 같지만, 그들에겐 뜻밖의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입궐하여 합격 증서를 나눠 받는 ‘방방’ 행사를 준비하는 것만도 버거운데, 접대해야 할 사람마저 부지기수였기 때문. 그래도 성대한 풍악을 울리며 3일 동안 진행되는 합격자 퍼레이드인 ‘유가’는 사대부의 삶에서 가장 기념이 될 만한 일이었을 터다.

응시생이 증가하면서 과열 경쟁이 대두했고, 유광억이라는 인물이 대대적인 대리시험 행위를 벌이다가 관아에 발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부정행위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 시험장 안과 밖에 연결 시설을 설치하거나 콧구멍 속에 ‘커닝페이퍼’를 넣는 등 부정행위에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과거 시험장에서 시권으로 과거 시험을 부정했던 조종도(1537~97)의 사례도 재밌다. 당시 과거제도를 학교 교육의 황폐화를 만드는 주범으로 인식했던 조종도는 답안으로 제출한 대책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경쟁시켜서 글의 문리를 대충 아는 사람을 선발시키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밖에 정조가 실시한 친시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비법을 논한 정약용의 ‘오객기’ 시권에 대한 풀이, 작성자 미상의 시권들이 의외로 많은데 작은 단서를 통해 작성 당사자를 찾아내는 과정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전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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