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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자인 동물과 동물인 여자의 동병상련

등록 2018-08-30 20:07수정 2018-09-01 16:13

“가부장제는 홀로 힘쓰지 못한다”
복잡한 ‘억압 매트릭스’ 드러내는
현대 페미니즘의 무기 ‘교차성’
교차성 × 페미니즘
한우리·김보명·나영·황주영 지음/도서출판 여이연·1만5000원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육체가 감옥이 되기도 한다. 여자가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베이글녀’)를 강요받을 동안 남자는 뇌가 섹시(‘뇌섹남’)하다는 말로 칭찬받는다. 유구하게도 여자는 육체로, 남자는 정신으로 표상돼왔다. 이때 육체는 정신의 하등이 된다.

“성폭력을 당하는 동안 고깃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출산과 수유 과정에서 젖소가 된 것 같다.” 젖가슴으로도 불리는 여자의 가슴. 젖꽃판, 젖무덤, 젖통(젖무덤을 낮잡아 이르는 말)… “동물의 몸이 인간의 ‘입맛’에 맞춰 부위별로 조각나고 명명되는 것처럼, 여성의 몸은 남성의 욕망에 따라 부위별로 평가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몸”이다. 여성이 겪는 폭력과 성적 대상화는 이렇듯 ‘동물화’와 무척 닮았다. 이때 동물은 인간의 열등이 된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들이 홀로 작동하지 않고, 서로를 떠받치며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출발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교차성 페미니즘은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들이 홀로 작동하지 않고, 서로를 떠받치며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출발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여성과 동물을 연결 짓는 일이 마땅치 않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런데, 그건 여성과 동물을 경시하는 구조의 반사적 거부반응 아닐지. 들켜버린 건 아닐지.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이런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페미니즘은 교차성 이론이라는 도구를 통해 가부장제, 종차별주의(인간중심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본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등이 따로 작동하지 않고 복잡하게 서로를 침투(교차)하면서 존속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억압의 거미줄이 어떻게 정교한 레이스인 척하는지 말이다.

이 책은 교차성 페미니즘의 발흥, 이론적 발전의 역사부터 핵심 개념, 쟁점, 활용법까지를 폭넓게 관통한다. 187쪽 분량에 고농축된 이 책은 지난 겨울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진행된 강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입말을 그대로 살려 읽기도 수월하다.

페미니즘의 성과가 백인 여성 중심으로 한창 맺혀가던 1960년대 미국, 유색인 여성이 겪는 ‘또 다른 형태’의 소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젠더와 인종의 교차가 비로소 드러낸 ‘공백’이었다. <여자는 다 백인이고, 흑인은 다 남자이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용감하다>(1982)라는, 흑인 여성 페니미스트들의 글을 모은 책(국내엔 아직 번역 안 됨)의 제목은 교차성의 정치학을 빼어나게 표현한다. ‘페미니스트의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1983)가 최근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는데, 흑인 여성 레즈비언이라는 ‘3중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그는 여전히 눈을 치키고 말한다.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어”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아”.

'특권과 억압의 교차축'. 각각의 선에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고 선으로 연결해보자. 우리 안에는 상대적으로 특권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위치가 혼재돼 있다. 권력은 하나의 축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도서출판 여이연 제공

‘교차’라는 용어는 미국 흑인 여성 법학자 킴벌리 크렌쇼가 1989년 발표한 ‘인종과 성의 교차를 주류화하기’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교차성 개념은 1990년대부터 미국 흑인 여성 사회학자 패트리샤 힐 콜린스에 의해 확장된다. 유색인 여성의 경험을 언어화하는 작업을 포함해, 지배와 억압의 복잡한 기제(“지배 매트릭스”)를 그려내는 데 필요한 비판적 분석 틀로 사용한 것이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고민한다. 불법촬영, 데이트폭력, ‘기울어진’ 사법정의 앞에서 “여성의 노동권과 시민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동시에 한국 조직문화의 위계성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공적 권력의 사적이고 자의적인 행사에 질문도 제기한다.” 지은이들은 “정확히 그런 이유에서 미투 운동은 젠더 정치학인 동시에, 노동과 시민의 정치학이자, 인권의 정치학”이며 “페미니스트 저항으로서 ‘미투’는 사회의 복잡한 권력 구조들을 바꿀 수 있는 급진적 변화의 가능성”이라고 주장한다.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킴에 따라 권력의 전체 형태 역시 변한다.”(벨 훅스) 교차성이 무엇을 변하게 하는지 주목할 가치가 여기에 있다.

핵심은,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가 가부장제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교차성은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현대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다.”(권김현영) 살아 있는 육체는 스스로 교차성을 띤다. 무게중심(코어)의 동의어가 바로 교차점이다. 몸의 앞뒤, 좌우, 상하를 구분하는 가상의 선이 교차하는 곳에 무게중심이 머문다. 아름답고 신비한 우리 삶은 감옥이나 공백이 되어선 안 된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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