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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픔은 덮지 않고 드러내야 한다

등록 2018-11-09 06:00수정 2018-11-09 19:04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여성작가
범죄실화와 회고록 섞인 첫 작품
성범죄·트라우마·사형에 관한 얘기
‘우린 과거를 어떻게 만나야 하나’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책세상·1만7000원

“내 기억은 언제나 할아버지가 자기 몸을 내게 비벼대는 걸로 끝났었다. 그 뒤 기억은 새카맣게 지워져 아무 것도 없었다. 기억이 끝나는 곳에서 과거의 사실도 끝나는 거라고 나는 언제나 생각했었다. 하지만…흉터가 있었다. 내 흉터가 통증을, 칠흑 같은 기억상실을 뛰어넘는 증거가 아닐까? 내 몸이 간직하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모르겠다. 영원히 모를 것 같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의 데뷔작으로 범죄 실화와 지은이의 아픈 체험이 섞인 작품이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성범죄, 가족, 트라우마, 사형, 법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원제 ‘팩트를 간직한 몸: 살인 그리고 회고록’에서 엿볼 수 있듯, 어린이를 살해한 소아성애자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지은이의 얘기가 갈마들며 전개된다.

1992년 2월10일 실종된 제러미 길로리 수색작업이 성과 없이 끝났다는 <아메리칸 프레스>의 보도. 이날 길로리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누리집 갈무리
1992년 2월10일 실종된 제러미 길로리 수색작업이 성과 없이 끝났다는 <아메리칸 프레스>의 보도. 이날 길로리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누리집 갈무리
2003년 6월 로스쿨 1년생이던 지은이는 뉴올리언스로 향했다. 사형제에 맞서 살인 혐의자를 변호하는 로펌에서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로펌 사무실 직원은 한 남성이 범죄를 자백하는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줬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의 얼굴에서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할아버지가 나를 만지던 손길을 다시 느꼈다.” 사형 반대자였던 지은이는 “리키가 죽기를 바랐다.” 리키 랭글리는 1992년 이웃에 사는 6살 제러미 길로리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2003년 재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지은이는 로스쿨을 졸업하고도 법조계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 “범죄가 내 개인의 일이 되자마자 감정이 변해버리는데 어떻게 내 신념을 위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과거는 귀신처럼 들러붙었고 불쑥 튀어나왔다. 외할아버지는 얘기한 적이 있다. “난 마녀다. 잊지 말거라. 남한테 이 일을 말하면 언제든 널 잡으러 올 거다. 언제든.” 떼어내고 싶었고,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리키를 이해해야 했다.

책은 친구 집에 놀러온 제러미를 리키가 살해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리키는 주검을 담요로 싸 벽장에 숨겼다. 보호관찰 담당자가 어린이 성추행죄를 저지르고 가석방된 ‘리키 랭글리’가 주변에 있다고 경찰에 알린다. 리키는 어린이 성추행으로 두 차례나 감옥살이를 했었다. 체포될 당시 “제가 그랬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라고 말했다.

리키 랭글리가 6살 어린이 제러미 길로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는 모습을 찍은 사진 <아메리칸 프레스>에 실렸다.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누리집 갈무리
리키 랭글리가 6살 어린이 제러미 길로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는 모습을 찍은 사진 <아메리칸 프레스>에 실렸다.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누리집 갈무리
지은이는 리키가 태어나고 자란 과정을 살핀다. 가해자와 피해자, 리키와 지은이가 겪은 비슷한 일들이 드러난다. 리키에게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죽은 형이 꿈에 나타났고, 지은이에게는 태어나서 얼마 뒤 숨진 세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리키는 ‘왕따’였고, 지은이도 친구가 없었다. 교도소에서 리키는 자신이 소아성애자임을 알고 스스로 치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또 범죄를 저지를까봐 “감옥에서 나가지 못하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여러차례 자살도 시도했다. 지은이도 5년 동안 외할아버지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애써 묻으며 힘겨워했다. 리키가 자신의 ‘질병’을 이겨내려 애쓴 사실을 확인한 지은이는 그를 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제러미 길로리가 주검으로 발견된 집 주변에 경찰 차들이 모여 있는 사진과 함께 당시 사건을 보도한 <아메리칸 프레스> 신문.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누리집 갈무리
제러미 길로리가 주검으로 발견된 집 주변에 경찰 차들이 모여 있는 사진과 함께 당시 사건을 보도한 <아메리칸 프레스> 신문.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누리집 갈무리
지은이는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제러미의 묘를 찾고 리키를 면회한다. 제러미의 엄마 로렐라이는 2003년 재심에서 “리키 랭글리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비명 또한 들린다”며 그의 편을 들었다. 로렐라이는 리키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추행하지는 않았다’는 리키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좀 더 쉽게 견딜 수 있는 방법을 원했던 그녀를 내가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외할아버지한테 역시 성추행을 당했던 여동생도 말했다. “난 나를 학대받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어.” 부모도 성추행을 알았으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갔다. 그게 편했으니까. 지은이의 기억도 몸 안의 흉터 앞에선 멈췄었다. 그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할아버지는 나를 성추행했어요”라고 말했다. 이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가해와 피해는 포개져 있다.

이 책은 과거를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에 관한 이야기다. 의식은 모르지만 몸은 알고 있다. 상처와 아픔에 등 돌리고 도망가는 대신 맞서 싸워야 함을 일깨운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지은이의 묘사가 생생하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3만쪽에 이르는 법원·정신병원의 기록, 꼼꼼한 취재에 바탕을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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