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과 함께 읽는 햄릿>(한국문화사 펴냄). 올해 84살인 전상범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책이다.
“셰익스피어(1564~1616)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에 자세한 주석을 달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먼저 <햄릿> 편을 내기로 하고 지난 1월 1일부터 매일 오전 3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고 7개월 동안 썼죠. 눈이 좋지 않아 3시간 이상은 할 수 없었어요. 그 이상 하면 글자가 겹쳐 보이거든요.” 지난 25일 전자우편으로 만난 저자의 말이다.
<햄릿> 영어 원문을 먼저 싣고 그 뒤에 300쪽 이상의 한국어 주석을 달았다. 한국어 번역문은 따로 없다. <햄릿>을 원문으로 공부하는 영문과 학생이나 한국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원문의 맛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주석은 원작의 뜻을 파악하는 데 보탬이 되는 단어나 문구 풀이에 초점을 뒀다. 이 책은 영어학 전공자인 전 교수의 정년 퇴임 뒤 13번째 저술이다. 10년 전에는 퇴임 뒤 독학한 라틴어 학습서(<라틴어 입문>)를 손녀와 함께 내기도 했다.
왜 첫 주석서가 <햄릿>이었을까? “셰익스피어 희곡 36편 중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햄릿>이죠. 셰익스피어가 한창 물이 올랐을 때 작품이고, 따라서 완성도가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이야깃거리도 가장 많이 제공해주죠.” 그는 <햄릿>의 교훈을 이렇게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비극은 성격에서 나온다고 해요. 비평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철학을 말하면서 ‘성격이 두 번째 운명이다(Character is the second destiny)’고 규정하는 이유이죠. <맥베스>는 권력욕, <오셀로>는 의심(정확히는 의처증), <리어왕>은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무지의 비극이죠. <햄릿>은 보통 ‘지성의 비극’이라고 하죠. 행동과 사고 사이에는 여러 패턴이 있는데 햄릿은 생각하고 나서도 행동하지 않아요. 흔히 지성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유형입니다. 왕인 삼촌이 참회의 기도를 하는 중에 죽이면 삼촌이 천당에 갈 것이라는 생각에 복수를 미루다 애인은 미치고 자신도 죽는 비극을 맞이하죠.”
그는 <고대영어>나 <중세영어>와 같은 책을 쓴 영어사 전공자다. “셰익스피어는 중세에서 현대 영어로 넘어오는 시대의 작가입니다. 그가 활동한 시대는 영어 철자법 통일이 되기 한참 전이었고 영어 문법도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어요. 셰익스피어는 과도기 언어가 갖는 유연성을 최대한 이용한 언어의 마술사입니다.” 덧붙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언어학자인 이치카와 산키는 영어학 전공학자이면서 셰익스피어의 거의 전 작품에 주석을 달았어요. 저도 주석 작업을 계속하고 싶지만 지금의 건강 상태로는 희망 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커요. 책 원고를 늘 웃는 낯으로 받아주는 출판사 사장님에게 미안해서 더는 책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아요.”
전 교수는 오전에 집필하고 오후엔 쉬운 소설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잠을 자는 데 쓴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펄 벅의 <대지>를 보면 주인공인 왕룽이 나이가 들면서 잠을 많이 자는 대목이 나옵니다. 앞으로 맞이할 오랜 잠의 예행연습이 아닐는지요.”
(*셰익스피어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유희(pun)에 능했다. 전 교수는 한국어 번역이나 영화로는 이런 재미를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면서 <햄릿>의 대표적인 펀을 소개했다.
(a) of the chameleon’s dish. I eat the air, promise-cramm’d.
표면적인 뜻: “카멜레온의 모이를 먹습니다. 약속으로 가득찬 공기말입니다”
또 다른 뜻: “실속 없는 상속자(heir=air)라는 말만 듣고 삽니다.”
(b) I am too much in the sun.
표면적인 뜻: “햇볕은 충분히 쏘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뜻: “그놈의 아들(son=sun)이란 말에 신물이 납니다.”
(c) Let her not walk i’ the sun.
Conception is a blessing, but not as your daughter may conceive.
“햇볕을 쬐게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상식(conception)이 느는 것은 다행이지만 잘못해서 따님이 임신(conceive)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이 문장 역시 sun을 son과 등치해 ‘따님의 임신’과 연결했음.)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