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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빠, 잘 지내고 있나요?

등록 2020-04-03 06:00수정 2020-04-03 10:21

28년간 다녔던 직장을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된 아빠
퇴직하며 사무실 책상에서 가져온 화분이 점점 시든다

오늘은 아빠의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
윤여준 글·그림/모래알·1만3000원

“여보, 나 출근.”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딸, 일어났어?”

현관에 신발이 하나둘씩 줄어들고, 집에는 헐렁한 잠옷 바지 차림의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는다. 뿌리 깊은 고정관념 탓에 ‘엄마’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식탁에 홀로 앉은 사람은 ‘아빠’다. <오늘은 아빠의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는 성인 딸의 눈에 비친 아빠의 퇴직 뒤 1년을 담은 그림책이다.

회사 일에 매달려 날마다 달려온 이에게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은 의미도 있고 반갑다. 아빠는 식구들의 아침식사를 챙기고, 청소·빨래를 하며 그동안 소홀했을 가사노동을 자연스레 맡는다. 신문도 보고, 등산도 하고, 친구를 만나며 오랜만에 허락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딸의 졸업식(대학)도 처음으로 참석한다. 딸의 눈에는 그런 아빠가 괜찮아 뵌다. ‘그렇게 아빠는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윤여준 그림, 모래알 제공
윤여준 그림, 모래알 제공

그런데 아빠가 퇴직하며 사무실 책상에서 가져온 화분이 점점 시든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강제 자유시간’은 의미도 있고 반갑지만, 어딘가에 소속돼 시간에 맞춰 일을 할 때 느끼는 만족감을 대신할 수 없다. 아빠의 어깨는 처지고 한숨이 늘어간다. 친구들을 만나면 넋두리만 내뱉는다. ‘요즘은 하루가 너무 길어, 일을 다시 할 수 있으려나 싶고….’

윤여준 그림, 모래알 제공
윤여준 그림, 모래알 제공

딸은 그제야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아빠의 어깨에 눈을 돌린다. ‘아빠, 왜 자꾸 비를 맞고 다녀요.’ 어른이 된 딸은 이제 아빠와 같이 쓰기에 충분한 우산을 갖고 있다.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같이 써요. 이젠 제 우산도 제법 커요.’ 퇴직 뒤에 자연스레 가사노동을 맡을 수 있는 아빠, 딸이 이해하고 보듬는 아빠는 분명 ‘성공한 아빠’인 것 같다.

윤여준 그림, 모래알 제공
윤여준 그림, 모래알 제공

이 책은 아빠의 후줄근한 줄무늬 잠옷 바지, 현관의 신발, 화분, 사진 액자 등 일상의 소재를 포착해 아빠와 딸의 심리를 담담하게, 자연스레 보여준다. 마치 짧은 단편영화나 만화를 보는 듯하다. 작가의 경험이 책 속 인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것 같다. “28년을 꾸준히 다녔던 직장을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된 아버지를 바라보며 (…) 수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아버지의 재취업과 반복되는 좌절을 지켜보며 퇴직한 중장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가족이 모두 나가고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조금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작가와 출판사의 인터뷰 중)

책장을 덮고 이런 생각을 한다면 작가의 의도가 온전히 전달될 것 같다. 꼭 아빠가 아니어도 좋다. 소중한 사람이지만 평소 소홀했던 이들이면 된다. ‘오늘은 ○○의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 7살 이상.

이승준 <한겨레21>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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