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선보인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동백꽃 필 무렵>을 굉장히 재미있게 봤어요. 등장인물들이 합심해서 연쇄살인범을 잡아내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요. 그것이 연대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심한 판타지를 꿈꾸나요?”
지난 1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학교에서 만난 이수정(56)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텔레그램을 이용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이른바 ‘엔(n)번방 사건’ 관련 전문가대책회의와 인터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교수는 국내 1세대 프로파일러로, 지난 20년 동안 굵직한 강력범죄들을 분석해왔고 영국 <비비시>(BBC)가 지난해 말 뽑은 ‘올해의 여성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그가 최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민음사)을 펴냈다. 이 책은 2019년 4월부터 1년간 방송한, 같은 제목의 네이버 오디오 클립을 재구성해 엮은 것으로, 범죄 영화 35편의 범죄 유형과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다. 진행자 이다혜 <씨네21> 기자와 이 교수는 디지털 성범죄, 강간문화, 성범죄 피해자 배제 문제 등을 다루면서 ‘피해자 중심’의 시각을 뚜렷이 했다. 공저자로 함께한 최세희(콘텐츠기획), 조영주(작가)씨까지 여성 제작진 네명 전원이 방송 시작 때부터 세운 원칙이었다. 이 교수는 “그동안 범죄 영화를 보면서 여성 신체의 시각화 등 쾌락적인 보여주기 방식에 문제를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범죄 영화 대부분이 가해자, 범죄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재현합니다. 영화 속 피해자들은 여성이 많은데 다들 말없이 죽어 있는 식으로만 나오지요. 그들에겐 목소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요.” 책은 1944년 조지 큐커의 기념비적 영화 <가스등>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 폴라는 남편 앤턴에 의해 통제되고 순응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 교수는 “이 영화에서 비롯한 ‘가스라이팅’이란 용어는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조작 대상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종의 세뇌”라며 “작은 역할 속에 여성을 매어두려는 것도 하나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시선은 영화에서 현실로 시선을 옮겨간다. “가정폭력처벌법의 기본 목적은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지 피해자의 생명권 보호가 아니에요. 피해자가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는 여전히 ‘가정’을 유지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가부장적 사고가 내포돼 있어요.”
두 여성 형사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파헤치는 영화 <걸캅스>를 예로 들면서는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디지털 성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에게 마이크를 주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그는 달리 생각한다고 했다. 조주빈이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여성을 향해 사과하지 않는 그의 면모 낱낱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 영화처럼 실제에서도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종종 삭제되는 것은 커다란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을 쓴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그동안 범죄 영화를 보면서 여성 신체의 시각화 등 쾌락적인 보여주기 방식에 문제를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의 영상이 어디까지 유포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큽니다. 배우자 사망 때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고 하지만 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스트레스가 5배는 높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고요.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도 온라인에는 피해자의 영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범죄예요.”
그는 이번 책에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강력히 주창한다. 미성년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더라도 성폭력으로 처벌할 수 있는 의제강간 연령은 1950년대 형법 제정 이후 줄곧 ‘13살 미만’에 머물렀다. 13살 이상 미성년자와는 성관계를 맺더라도 처벌할 수 없는 허점이 줄곧 제기돼왔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삼은 범죄의 경우 가정과 지역사회의 관심, 국가의 책임이 모두 중요합니다. 법과 제도를 타이트하게 운영해야 하죠. 엔번방이라는 처참한 사건의 경우, 불특정 가해자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한 이들에게 언젠가는 당신들도 반드시 회복될 것이란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꼭 믿어주면 좋겠습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