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기억해요…그 길, 그 사람, 그 빛을

등록 2020-05-15 06:01수정 2020-05-15 10:55

인권운동가 박래군 소장 ‘제주서 서울까지’ 10년간 써내려간 ‘인권기행’
소록도·광주·남산 등 국가폭력 현장 찾고 시민저항의 끈질긴 역사 조명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박래군 지음/클·1만8000원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만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제주 4·3의 현장인 큰넓궤부터 서울 세월호 광장까지 10년에 걸친 ‘인권기행’을 담은 세 번째 단독저서를 내놨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만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제주 4·3의 현장인 큰넓궤부터 서울 세월호 광장까지 10년에 걸친 ‘인권기행’을 담은 세 번째 단독저서를 내놨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그 길의 시작은 ‘제주 4·3’이었다. 2018년 2월, 그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큰 동굴)에 갔다. 동굴 입구를 막아놓은 쇠창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폭도 좁고 높이도 낮은 동굴을 20미터쯤 기어가니 지름 180미터의 너른 공간이 나왔다. 72년 전, 이곳에 사람이 있었다. 무등이왓 마을과 인근의 주민 120명이 토벌대를 피해 50일 동안 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지슬(감자)을 먹으며 버텼다. 그러나 결국 발각됐다. 이들 중 40명이 정방폭포에서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다. 그들이 숨진 정방폭포에는 4·3 유적지라는 팻말 하나 없었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는 한국 인권 현장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이 쓴 인권 기행기다. 인권의 시각으로 한국현대사가 남긴 아픔의 현장을 답사한 ‘다크 투어리즘’이라 해야 할까. 2011년 한 답사 프로그램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국가폭력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을 틈틈이 했던 그가 그간 10년의 답사 경험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지은이는 인권을 짓밟은 “국가폭력-국가범죄의 원형”을 찾아나섰다. 제주 4·3의 현장에서 여정의 첫발을 뗐다. “반공국가 대한민국은 이곳에서 출발했다. 반공의 장벽을 조금이라도 넘을 것 같으면 곧바로 ‘빨갱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졌다. (…) 세계적 냉전질서가 해체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좌익’ ‘빨갱이’라는 이념 공세가 유효하게 작동하는 답답한 현실은 여기서부터 형성되었다고 본다.”

국가폭력의 현장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책은 제주 4·3에 이어 한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소록도, 광주 5·18 현장, 서울 남산 안기부 터와 남영동 대공분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등의 공간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되짚는다.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역사 현장 같지만 이곳은 같은 상흔을 보여준다. “죽을 때까지 강제노동”을 하거나 “낙태수술을 당하”며 소수자로서 차별을 받은 한센인들, 198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고문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그 흔적이 오롯이 남았다.

광기와 폭력의 시대에 시민들은 저항의 역사를 아로새겼다. 그 속에는 운명적인 결단으로 죽어간 이들도 있고 억울한 죽음에 연대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지은이는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이룬 것이 “민주화 과정이자 인권의 실현 과정”이라고 말한다.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친 금남로 등 ‘광주 5·18’ 현장에서 그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떠올린다. “2018년 겨울, 윤상원이 쓰러진 자리에 나는 38년 만에 섰다. 1980년대 이후 민주주의가 시작된 바로 그 지점이다. 그의 죽음 위에서, 그리고 ‘윤상원들’의 죽음 위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없는 5·18 시민들을 이야기한다.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고 부상자를 간호하고 시신을 염하고 기록을 남긴 이들이다.

“해방 이후 이 땅에는 너무도 억울한 죽음들이 쌓이고 쌓여 퇴적층을 이루었다. 그 죽음들을 끌어안고 지금까지 제대로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쳐왔기 때문에 인권의 현실은 조금씩 개선되어왔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제주 4·3에서 출발한 인권 기행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끝난다. 광화문광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광장’으로 불리며 연대의 공간이 되었다. 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그는 오늘도 ‘인권의 최전선’에 서 있다.

“나는 광장의 힘을 믿는다. 광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외쳤던 그 겨울 촛불의 물결을 기억한다. 그 촛불이 바다 속에서 침몰한 세월호를 인양해 올렸고 다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기구를 출범하게 했다. 아직 목표에 다다르지는 못했어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안다.”

책은 독자가 직접 도서 제작비에 투자하는 ‘북펀드’ 방식으로 출간됐다. 연대의 책이다. 도움을 준 339명의 이름이 책에 실려 있다. 인세는 모두 ‘인권재단 사람’의 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인양된 세월호 선체 안…현장 잘 알수록 힘이 들었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인터뷰

“사람들은 대부분 제노사이드 조약이나 인권조례의 내용을 설명하면 지루해하고 따분해해요. 무거운 주제이기 때문이겠죠? 여행기라는 형태로 ‘인권’을 이야기하면 누구나 책을 쉽게 이해하고 읽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만난 박래군(59)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쓴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투쟁, 2009년 용산 참사 진상규명, 2013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시위, 2014년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등 굵직한 사회문제부터 장애인, 성소수자 시위 등 사회적 약자들이 싸울 때 그는 늘 든든한 동지이자 배경이 되었다.

“2011년 가을에 ‘박래군의 천리길’이라는 인권 현장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보름 동안 제주도 4·3 유적지부터 분단 현장까지 돌아보는 ‘빡센’ 여정이었죠. 참여자들 반응은 무척 좋았어요. 그때 인권 답사기를 책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 원고를 쓰던 지난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그는 곧바로 현장으로 갔다. 2011년 기획한 책이 만 9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까닭이다. 33년 동안 인권운동을 해온 박 소장은 지금까지 여러권의 공저와 단독저서를 썼다. 하지만 여행기를 쓰는 건 처음이어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광주 5·18 부분에서 학생운동 과정을 길게 설명했더니 편집자한테서 ‘이게 무슨 여행기냐’는 지적을 받았어요. 때론 너무 이론서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여행기 쓰기가 쉽지 않더군요. 하하.”

지난 10년 동안 8개 사건의 현장 수십곳을 찾은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인양된 세월호 선체 안이었다. “그 현장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그곳에 있을 때면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어요. 당시 상황이 연상되거든요. 세월호 선체에 들어갔을 때 아이들이 떠올랐어요. 유가족은 얼마나 더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고통스런 일을 누구도 겪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으면 합니다.”

그는 “역사 현장을 찾을 때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나아가 현장은 단지 과거의 일만 알려주는 장소만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학살과 고문은 정치, 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그 일은 이미 발생했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도 다시 발생할 수 있다’라고 말했잖아요. 우리가 과거를 잊고 성찰하지 않으면 과거의 폭력은 언제고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한다.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뭔가 매개물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이한열을 떠올릴 때 운동화가 생각나는 것처럼요. 그런 매개물로서 ‘현장’을 어떻게 다음 세대들에 전할지 많은 고민이 듭니다.”

박 소장은 인권기행 두번째 책을 계획하고 있다. 이번 책에 담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동학혁명 유적, 순교지, 형제복지원, 전태일 열사 청계천 등 역사 현장을 쓰고 싶어요.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을 해 놓아야 반드시 쓸 것 같네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