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다산책방·1만4800원
왼쪽부터 강화길, 윤성희, 백수린, 최은미 작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저희 네 명이 함께 모인 건 처음이네요.”
마스크를 쓴 여성 작가 4명이 한꺼번에 카페로 들어왔다. 현재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윤성희·최은미·강화길·백수린 작가다. 지난 1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이들은 지난달 함께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소설집 <나의 할머니에게>. ‘어제 꾼 꿈’, ‘흑설탕 캔디’, ‘선베드’, ‘11월행’ 등 6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출판하는 앤솔로지다.
<나의 할머니에게>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서사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잘 다루지 않는 할머니를 중심 주제로 세웠다. 우리 곁에 있었지만 정확하게 응시된 적 없었던 ‘여자 어른’의 이야기다.
소설은 6인 6색의 할머니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제 꾼 꿈’(윤성희)은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를 들려주고 싶은 이루기 힘든 꿈을 꾸는 할머니의 고독을 그리고, ‘흑설탕 캔디’(백수린)는 외국인 할아버지와 설레는 감정을 나눴던 할머니의 몽글몽글한 추억을 보여주며, ‘선베드’는 치매에 걸려 “손녀를 완전히 잊어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11월행’(최은미)은 템플스테이를 떠나는 3대 모녀의 모습을, ‘위대한 유산’(손보미)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큰 집을 처분하려고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손녀의 시선으로 되짚는 할머니의 굴곡진 삶을 보여준다. ‘아리아드네 정원’(손원평)은 미래를 배경으로 수용소 같은 공간에 사는 할머니의 고독한 일상을 그렸다.
“할머니는 한 번쯤 쓰고 싶은 매력적인 소재”였다는 윤 작가는 지난해 봄 출판사의 청탁 제의를 받고 ‘이건 써야겠다’ 생각했다.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10대부터 90대까지 각 세대의 결이 다 담겨 있어요. 어느 순간에는 10대 같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70대 같아요. 다른 나이대의 결이 한 사람의 목소리에 포개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할머니라는 같은 주제를 갖고 동시대 여성 작가들과 함께 쓴다는 것은 즐거운 창작 작업이었다. 최 작가는 “같이 참여한 작가들 이름을 보면서 이 작가는 할머니 이야기를 어떻게 쓸지 궁금했어요”라고 말했다. 따로 또 같이 작업한 책은 작가 6명의 글을 통해 그들의 개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강 작가는 “다른 앤솔로지 작업에도 몇 번 참여했는데 그때마다 어떻게 같은 주제를 받고도 이렇게 다양하게 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여한 작가인 저도 신기해요”라고 했다.
윤 작가는 2009년에 출간된 소설집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이후 오랜만에 앤솔로지 작업을 했다. “제가 이 중에서 제일 연장자예요. 잘 쓰는 후배들 사이에서 묻어가는 기분이에요.(웃음)”
‘눈 밝은’ 작가들이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 발견한 빛나는 장면이 많다. 최 작가는 ‘흑설탕 캔디’에서 할머니가 손녀에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빨간 망토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꼽았다. “손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자 무섭다고 하니 할머니가 ‘이건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야. 호랑이 배 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남은 아주 용감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지’라고 본인이 재해석해 들려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반대로 백 작가는 최 작가의 ‘11월행’에서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라는 한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단다. “할머니란 딸과 그 딸의 딸로 이어지는 역사를 나이테처럼 지닌 존재라는 걸 환기시켜주는 것 같아요. ”
소설 속 할머니 이야기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강 작가는 “이 소설은 엄마의 친구가 들려준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했어요. ‘요양원에선 운동을 하고 밥을 먹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햇빛 쬐는 시간에 (요양원 노인들이) 누워있다’ 그 말을 듣고 그 장면을 상상하며 소설을 시작했어요” 라고 말했다.
뜻하지 않은 다른 콘텐츠에서 소설의 영감을 받기도 한다. 윤 작가는 “드라마를 보다가 한 지방지 기자가 백살 넘는 노인을 인터뷰하는 걸 봤어요. 그 노인이 ‘늙는 게 뭔지 아오? 한 달에 3주 동안 설사를 하다가 한 주는 변비에 걸리는 거요.’ 이 대사가 너무 웃기면서 굉장히 슬펐어요.” ‘어제 꾼 꿈’에서 변비에 걸려 끙끙대며 토끼 똥을 누는 할머니의 모습은 드라마 속 노인의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최 작가는 자신과 엄마와 딸 모녀 3대를 생각하며 작품을 구상했다. “중간 세대인 나를 중심으로 손녀와 할머니로 연결된 두 명과 하룻밤이라도 여행을 다녀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세 명을 집을 떠나 다른 사람들이 밥 해주는 곳에서 완전히 쉬게 해주고 싶었어요. 어린 여자아이에서 노년에 걸쳐 있는 세 명의 여자의 모습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수도 있고요.”
작가들은 보통 매체에서 단선적이고 납작한 할머니의 모습을 깨고 싶은 바람도 소설에 녹였다. 백 작가는 “보통 할머니라고 하면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배울 기회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할머니가 아닌 할머니를 재현하고 싶었어요. 저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할머니를 그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최 작가는 실제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활동적이고 의욕적인 젊은 할머니를 그려보고 싶었다. “딸이 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했어요.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났지만 아직 젊은 60대 할머니는 다양한 외부 활동도 하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른의 모습일 테죠.”
<나의 할머니에게>에 대해 소설가 오정희는 ‘추천의 글’에서 “작가들은 할머니들의 곰삭은 향기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습과 인간 존재의 신비를 전해준다”라며 “그들의 우여곡절과 슬픔, 상처로 인해 인간이란 이렇듯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점도 깨닫게 해준다”고 평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작가들에게 물었다.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너무 완고해지지 않고 유연성을 가진 할머니요!”(백수린) “전 그냥 예전보다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강화길) “만성질환 없는 할머니요. 먹고 싶은 걸 다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최은미) “화투점을 보고 들꽃 이름을 외우는 할머니요.하하.”(윤성희)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나의 할머니에게>를 펴낸 강화길, 최은미, 윤성희, 백수린 작가(왼쪽부터).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