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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난민의 섬에 톨레랑스는 없다

등록 2020-10-16 04:59수정 2020-10-16 09:54

장 지글러가 보고 쓴 레스보스섬의 난민인권보고서
아름다운 시인 사포의 땅 “인권 유럽의 치부”로 전락
지난 9월9일(현지시각)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모리아 난민캠프에 있는 난민들이 화재를 피해 도망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 9월9일(현지시각)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모리아 난민캠프에 있는 난민들이 화재를 피해 도망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인간 섬: 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럽의 난민 이야기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갈라파고스·1만3000원

“모리아에서 어디를 바라보건 누구와 말을 하건,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난민 대다수는 자기 나라에서 겪은 참혹함과 그 후에 이어진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정에서 참아 내야 했던 굴욕과 수치심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기아와 빈곤 문제를 천착해온 사회학자 장 지글러의 <인간 섬>이 나왔다. 이 책은 그가 2019년 5월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의 부위원장 자격으로 방문한 유럽 최대의 난민촌 그리스 레스보스섬에 관한 기록이다. 이곳 난민들의 비참한 실상과 이곳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유럽연합의 위선을 까발린다.

시인 사포의 고향 레스보스섬에 있는 모리아 난민캠프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최대 정원이 2757명이지만 그 4배가 넘는 1만2600여 명이 생활하는 캠프 아무데나 대소변이 쌓여 들쥐가 들끓었다. 제공되는 식사도 형편없어 지글러가 식사 배급 현장에서 본 음식에는 “구역질 나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난민들은 그리스 정부가 발급하는 정식 체류 허가증을 받아야 다른 나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체류 등록만 20일 이상이 소요되며, 난민 자격 심사를 받기까지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다 보니 난민들은 섬을 떠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의 안전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동반 보호자 없는 아동은 반드시 어른들과 분리된 곳에서 잠을 자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곳 난민촌에는 미성년자들이 국적과 상관없이 성인들과 섞여 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성적 학대, 신체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곤 한다.

터키와 그리스 사이 바다인 에게해에서 벌어지는 ‘푸시백 작전’의 실체도 공개한다. 이 작전은 난민들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을 가리키는데, 이런 행위를 주도하는 것은 유럽연합 회원국의 외부 국경 관리 업무를 맡은 유럽국경·해안경비청(프론텍스)이다. 이들은 난민들을 태운 고무보트나 나룻배, 뗏목 등을 터키 영해 쪽으로 밀어내 난민들이 유럽 영토에 들어와 망명 신청서를 접수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다. 배를 돌리기 거부한 난민들을 막대기로 때리거나 그들의 작은 고무보트 주위를 배로 빙빙 돌면서 보트가 뒤집히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 잔인한 푸시백 작전에 대해 지글러는 “난민에게 망명을 신청할 권리조차 주지 않는 명백한 인권 침해”이자 “난민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사회학자 장 지글러. 갈라파고스 제공
사회학자 장 지글러. 갈라파고스 제공

난민의 섬을 설계하고 푸시백 작전을 지원하는 건 ‘인권 대륙’을 자처하는 유럽연합이다. 지글러는 특히 2015년 5월 유럽연합 회원국 간에 체결된 국경개방조약으로, ‘하나의 유럽’을 상징하는 ‘솅겐 협약’의 위선을 꼬집는다. “솅겐 협약은 유럽연합의 대외적인 경계가 적절하게 통제되고 엄격하게 감시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 핫 스폿(레스보스섬)과 난바다, 영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그러므로 난민들의 대량 유입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령에 복종하게끔 되어 있다.”

난민들의 캠프 이름인 모리아는 스페인어로 ‘그는 죽고 있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곳의 난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각종 질병, 자살 등으로 죽어 간다. 이곳에 톨레랑스(관용)와 인도주의로 대표되는 ‘유럽의 정신’은 없다. 이 ‘죽음의 섬’을 목격한 지글러가 내리는 결론은 하나다. 레스보스섬의 난민캠프는 즉각 폐쇄되어야 한다는 것. 올해 1월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레스보스, 유럽의 수치’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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