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 드럭스
토머스 헤이거 지음, 양병찬 옮김/동아시아·1만7000원
코로나19 치료약과 백신은 언제 나올까?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개발한 치료제를 활용한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미국 화이자는 백신 3상 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다.
신종 감염병 치료제와 백신에 관심이 많은 이때 과학전문 저술가 토머스 헤이거가 쓴 <텐 드럭스>는 약물의 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돕는다. ‘의학사를 바꾼 10가지 약물’이라는 주제로 모르핀, 비아그라, 피임약 등 약의 탄생과 진화, 그 약으로 인한 사회·정치적 변화를 두루 담았다.
때가 때인 만큼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백신의 탄생을 다룬 2장 ‘레이디 메리의 괴물’ 편이다. 백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다. 면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세계 최초의 백신인 천연두 백신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책은 그보다 먼저 유럽에 인두법을 최초로 소개한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1689~1762)를 조명한다. 남성 위주의 의학사에서 지워진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는 오스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로 발령받은 남편과 함께 터키에 머물던 때 천연두를 예방하는 ‘접붙임’ 즉 인두법을 알게 된다. 천연두 환자의 딱지 같은 감염물질을 피부에 접촉시키는 방법이다. 실제로 아들에게 인두법을 시도하고 그 덕에 아들은 천연두를 크게 앓지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 이 방법을 알리려 했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의학 전문가도 아니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왕실과 상류층에 이 방법을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섰다. 그의 노력으로 죄수와 고아들을 대상으로 사상 최초의 임상시험이 이루어지고 인두법으로 천연두 예방의 탁월한 효과를 입증했다.
“1970년대 이후 지구상에서는 단 한 건의 천연두 사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레이디 메리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사이에, 우리는 어찌어찌하여 인류 최악의 질병을 지구상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아마도 의학사상 위대한 성공일 것이다. 그것은 메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의 초상. 위키미디어 커먼스
백신과 항생제는 인간을 ‘유행병의 가엾은 희생자’에서 ‘유행병을 물리치는 전사’로 거듭나게 했다. 200년 전만 해도 유년기의 유행병으로 불리는 홍역, 백일해, 디프테리아 등으로 사망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 수가 현저히 적다. 평균 수명이 연장된 것 역시 약물의 공이 크다.
현대사회에서는 도리어, 약을 너무 많이 먹는 게 문제다. 미국인 중 과반수는 한가지가 넘는 처방약을 규칙적으로 복용하고 그중 대부분은 1인당 1년에 4~12가지 처방약을 먹는다. 여기에 비처방약인 비타민, 아스피린, 건강기능식품 등을 합치면 미국인들은 평균 수명 78.54년 동안 하루에 알약 2개를 먹는 꼴이다. 평생 5만개 넘는 약을 먹는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수많은 약을 먹고 삶을 이어가는 ‘약 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사회에 사는 우리는 ‘호모 파르마쿰’(약을 만들고 복용하는 종)이며, 그곳에서는 뭐든 약으로 해결하는 ‘삶의 의료화’가 급속히 진행된다. 일례로 콜레스테롤 억제제 ‘스타틴’에 대해 일부 의학 전문가들은 “건강 영역에서 노력, 책임, 보상을 잇는 연결고리를 단절한다”고 지적한다. 환자들에게 이 약을 먹으면 콜레스테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 식이요법이나 운동요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가짜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2014년에 한 연구지에 발표된 ‘스타틴 시대의 폭식’이라는 제목의 연구서를 보면, 스타틴을 복용한 환자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지방과 칼로리 섭취량이 많아졌고 그 결과 체중이 더 많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약 권하는 사회에는 거대 제약사들의 ‘빅비즈니스’가 작동한다. 제약사들은 오래,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장기 집권하는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그런 필요 때문에 탄생한 약이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관절염 치료제 쎄레브렉스다. 이 두 약의 공통점은 기저질환을 치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기 장애와 관절병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주지만,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이 두 약은 질병이 아니라 증상을 치료한다. 이런 증상을 치료하는 ‘삶의 질 개선제’는 끊임없이 처방될 수 있다. 만약 환자가 복용을 중단하면 증상이 재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질 개선제는 제약사에게 끊임없이 수익을 안겨준다.
이에 반해 세균 감염 때문에 걸리는 질병을 치료하는 항생제 개발은 더디다. 최초의 항생제인 설파제가 처음 등장한 1935년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30여 년 동안 20가지 계열의 항생제가 개발되었지만 그 이후 50년 동안 개발된 항생제는 단 두 가지뿐이다. 그 이유는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은 막대하지만 그 수익이 별로 많지 않아서다. 병에 걸리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와 달리 감염병 환자는 몇 주 동안만 치료받고 나면 더는 항생제를 복용할 필요가 없다. 결국 제약사 입장에서 항생제는 돈 안 되는 약일 뿐이다.
특히 지은이는 영리 추구가 목적인 제약사에 신약 개발의 주도권을 주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적 기금에 기반한 다른 모델” 즉, 공공의료의 영역에서 신약 개발을 주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2019년 5월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올해 코로나19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 지은이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새롭고 특이한 세균이 튀어나와 모든 것을 휩쓰는 팬데믹’이 올까 불안에 떨기보다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인 비알콜성지방간(NASH)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올해만 보면 그 예상은 빗나갔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약을 먹고 그 중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약이 얼마나 많은지를 살펴보게 하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하루 12시간 번역에 꽂힌 이유 “새로운 과학적 사실 알아가는 재미”
과학전문 번역가 양병찬씨
<텐 드럭스>를 번역한 양병찬(60·사진)씨는 이름이 꽤 알려진 과학전문 번역가이다. 40살에 약학대학에 들어가 졸업하고 뒤늦게 번역일을 시작한 그는 20여 년 동안 <센스 앤 넌센스> <자연의 발명> <물고기는 알고 있다> <핀치의 부리> <의식의 강> <경이로운 생명> 등 60여 권을 옮겼다. 지난해에는 <아름다움의 진화>로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
그는 11일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텐 드럭스>는 번역가이자 약사인 나와 궁합이 맞는 책”이라며 “과잉처방과 진료를 부추기는 약 권하는 사회를 향한 지은이의 비판에 나도 공감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약사로 일할 때 불필요한 약을 환자들에게 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정보가 가득한 책이라는 점도 이 책의 매력으로 꼽았다. “요즘 과학책이 많이 나오지만 과학책인지 수필집인지 알 수 없는 책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 책에는 인두법을 영국에 처음 알린 메리 워틀리 몬태규 이야기, 제약사들의 탄생, 최신 의약품 단클론항체의 개발 등 나 역시 잘 몰랐던 새로운 내용이 풍성해요.”
하루 12시간 번역일을 한다는 그는 고되지만 일의 즐거움이 크다고 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과학 분야의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니 논문을 계속 찾아봐야 해요. 그래서 번역할 때 항상 관련 논문을 찾아봐야 하니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죠.”
포항공과대 생물학연구정보센터 바이오 통신원인 그는 <네이처> <사이언스> 등 국외 과학저널에 실린 의학과 생명과학 기사도 번역하고 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번역을 하고 있어요. 이게 돈을 벌고 그런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과학 뉴스를 가장 먼저 전한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합니다.”
그는 번역할 때 책 두께와 상관없이 하루에 3~5쪽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번역의 질을 유지하려고 스스로 정한 작업의 선이다. 그뿐인가. ‘국어공부를 열심히 해라’ ‘읽히지 않는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과학 번역은 해석이 아니라 해설이다’ 등 자신이 정한 과학번역의 7대 원칙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에 나선다. “20년째 번역을 하는데 여전히 재미있어요. 올해 환갑인데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살까지는 번역을 하고 싶어요.”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