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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림책 타고 떠난 어르신들의 시간여행

등록 2021-03-05 05:00수정 2021-03-05 11:02

“꽃을 좋아한게 그림마다 꽃이여”

꽃을 좋아한게 그림마다 꽃이여

김막동·김삼덕·김옥남·김점순·김희수·도귀례·문성림·박노운·안기임·양양금·윤금순·한광희 지음, 김선자 기획·기록/북극곰·1만8000원

어른에게 그림책은 종이로 된 타임머신이다.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순식간에 자신의 유년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꽃을 좋아한게 그림마다 꽃이여>를 쓴 어르신 12명은 직접 그림책을 만들며 시간여행을 했다. “오재미(놀이 주머니) 던지며 놀던” 어린 시절부터 “다리에 힘만 좀 더 오르면 뭔 일이든 할 것 같은” 요즘까지 그림으로 표현하며 추억에 잠겼다.

양양금 할머니가 예전에 살던 집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가족 열두 명이 방 두 개에서 살았지만 “아부지 어메도 꽃을 좋아해” 마당에는 코스모스를 심었다고 회상했다. 북극곰 제공
양양금 할머니가 예전에 살던 집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가족 열두 명이 방 두 개에서 살았지만 “아부지 어메도 꽃을 좋아해” 마당에는 코스모스를 심었다고 회상했다. 북극곰 제공

그림책 기획은 전남 곡성 서봉마을 길작은도서관 김선자 관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지난 2016년 <시집살이 詩집살이>로 동네 어르신을 시인으로 ‘데뷔’시켰던 김 관장은 이번에는 활자 대신 이미지로 인생을 표현해보자고 어르신들을 설득했다. “그림은 정말 못 그린다”며 우는소리를 했지만 그림책을 보여주자 돌변했다. ‘안내자’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루리 작가는 “남강한 작가와 격주로 곡성을 방문해 <어머니의 이슬털이> 같은 그림책을 보여드렸다. 이걸 보시더니 그야말로 추억과 그림에 푹 빠져서 1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림만 그리시더라”고 했다. 그림 옆에는 설명도 곁들였다.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도 있어 김 관장이 말로 인터뷰하고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받아적었다.

양양금 할머니가 어린 시절 자주 했던 ‘오재미’ 놀이를 회상하며 그렸다. 북극곰 제공
양양금 할머니가 어린 시절 자주 했던 ‘오재미’ 놀이를 회상하며 그렸다. 북극곰 제공

그렇게 완성한 그림들엔 세 가지가 자주 등장한다. ‘쑥, 꽃, 총.’ 어르신들의 유년 시절은 늘 허기졌다. “논에 언덕에 노물(나물) 캐러 갔어요. (…) 쑥 캐다 밀가리(밀가루) 버물러(버무려) 쪄묵고 쑥부쟁이 삶아서 무쳐먹고 그때는 그렇게 살았어요.”(김막동) 그림 속 쑥이 속없이 푸르다.

난데없이 총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 어릴 때는 전쟁놀이를 많이 했어요. (…) 뒤로 가서 빵빵빵빵 다 전멸시켰어요.”(한광희) 6·25 전쟁이 유년의 배경이었기에 놀이에도 총이 끼어들었다. “동네 사람을 줄줄이 다 엮어갖고 밤에 끗고 갔어요. (…) 뿅뿅뿅뿅 쏴분께… 피가 한 사흘이나 흘렀을까.”(김막동) “우리 남동생이 늦게 태어나서 져 나를 사람이 없어서 여자들이 다 머리빡에 이고 져 날랐어.”(도귀례) 떨고, 숨고, 피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간이 단순한 선과 원색의 색채로 그려졌다.

한광희씨가 ‘전쟁 놀이’를 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북극곰 제공
한광희씨가 ‘전쟁 놀이’를 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북극곰 제공

그럼에도 그림마다 등장하는 게 꽃이다. 고향을 그려도 꽃이 있고, 중학교에 가지 못해 서러웠던 장면을 표현해도 한 켠엔 꽃이 등장한다. 폐암을 앓던 영감(남편)이 쓰러져 구급차 안에서 “얼매나 운지 몰랐”던 순간을 회상하면서도 노란 구급차보다 길가의 가로수를 더 많이 더 크게 그렸다. 삶의 어떤 순간을 회상해도 꽃과 나무를 함께 떠올리는 어르신들에게서 깊은 인생 내공이 느껴진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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