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좋아한게 그림마다 꽃이여
김막동·김삼덕·김옥남·김점순·김희수·도귀례·문성림·박노운·안기임·양양금·윤금순·한광희 지음, 김선자 기획·기록/북극곰·1만8000원
어른에게 그림책은 종이로 된 타임머신이다.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순식간에 자신의 유년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꽃을 좋아한게 그림마다 꽃이여>를 쓴 어르신 12명은 직접 그림책을 만들며 시간여행을 했다. “오재미(놀이 주머니) 던지며 놀던” 어린 시절부터 “다리에 힘만 좀 더 오르면 뭔 일이든 할 것 같은” 요즘까지 그림으로 표현하며 추억에 잠겼다.
양양금 할머니가 예전에 살던 집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가족 열두 명이 방 두 개에서 살았지만 “아부지 어메도 꽃을 좋아해” 마당에는 코스모스를 심었다고 회상했다. 북극곰 제공
그림책 기획은 전남 곡성 서봉마을 길작은도서관 김선자 관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지난 2016년 <시집살이 詩집살이>로 동네 어르신을 시인으로 ‘데뷔’시켰던 김 관장은 이번에는 활자 대신 이미지로 인생을 표현해보자고 어르신들을 설득했다. “그림은 정말 못 그린다”며 우는소리를 했지만 그림책을 보여주자 돌변했다. ‘안내자’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루리 작가는 “남강한 작가와 격주로 곡성을 방문해 <어머니의 이슬털이> 같은 그림책을 보여드렸다. 이걸 보시더니 그야말로 추억과 그림에 푹 빠져서 1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림만 그리시더라”고 했다. 그림 옆에는 설명도 곁들였다.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도 있어 김 관장이 말로 인터뷰하고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받아적었다.
양양금 할머니가 어린 시절 자주 했던 ‘오재미’ 놀이를 회상하며 그렸다. 북극곰 제공
그렇게 완성한 그림들엔 세 가지가 자주 등장한다. ‘쑥, 꽃, 총.’ 어르신들의 유년 시절은 늘 허기졌다. “논에 언덕에 노물(나물) 캐러 갔어요. (…) 쑥 캐다 밀가리(밀가루) 버물러(버무려) 쪄묵고 쑥부쟁이 삶아서 무쳐먹고 그때는 그렇게 살았어요.”(김막동) 그림 속 쑥이 속없이 푸르다.
난데없이 총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 어릴 때는 전쟁놀이를 많이 했어요. (…) 뒤로 가서 빵빵빵빵 다 전멸시켰어요.”(한광희) 6·25 전쟁이 유년의 배경이었기에 놀이에도 총이 끼어들었다. “동네 사람을 줄줄이 다 엮어갖고 밤에 끗고 갔어요. (…) 뿅뿅뿅뿅 쏴분께… 피가 한 사흘이나 흘렀을까.”(김막동) “우리 남동생이 늦게 태어나서 져 나를 사람이 없어서 여자들이 다 머리빡에 이고 져 날랐어.”(도귀례) 떨고, 숨고, 피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간이 단순한 선과 원색의 색채로 그려졌다.
한광희씨가 ‘전쟁 놀이’를 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북극곰 제공
그럼에도 그림마다 등장하는 게 꽃이다. 고향을 그려도 꽃이 있고, 중학교에 가지 못해 서러웠던 장면을 표현해도 한 켠엔 꽃이 등장한다. 폐암을 앓던 영감(남편)이 쓰러져 구급차 안에서 “얼매나 운지 몰랐”던 순간을 회상하면서도 노란 구급차보다 길가의 가로수를 더 많이 더 크게 그렸다. 삶의 어떤 순간을 회상해도 꽃과 나무를 함께 떠올리는 어르신들에게서 깊은 인생 내공이 느껴진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