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
‘구경거리’ 코뿔소 그린 ‘…전시회’
갓 도살당한 동물을 그린 ‘푸줏간’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
‘구경거리’ 코뿔소 그린 ‘…전시회’
갓 도살당한 동물을 그린 ‘푸줏간’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내의 개를 판자에 뉘어 네 발을 못으로 박아놓고 산 채로 해부했다. 그는 동물이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하고 그들이 지르는 비명은 ‘톱니바퀴의 소음’과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았던 데카르트 학파의 믿음이 오류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변했는가?
동물은 오랫동안 인간들의 ‘구경거리’였다. 현대적 의미의 동물원이 세워지기 전부터 동물은 인간의 ‘보는 쾌락’을 위해 이용당했다. 18세기 유럽을 떠돌며 ‘야생을 파는 도구’가 되었던 인도코뿔소 클라라도 그랬다.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롱기(1701~1785)가 1751년께 그린 <베네치아에서 열린 코뿔소 전시회>는 베네치아 카니발 기간에 전시됐던 코뿔소 클라라와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담은 그림이다. 가면축제 기간이라 그림 속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모자와 가면을 썼다. 당시 코뿔소는 유럽에서 매우 보기 드문 존재여서 클라라는 엄청 유명해졌다.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장장 17년 동안 네덜란드공화국, 신성로마제국, 스위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프랑스, 양시칠리아왕국, 보헤미아왕국, 덴마크, 영국을 순회하며 사람들을 만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 사람들과 ‘만난’ 게 아니라 ‘끌려다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고향인 인도의 아삼 지역을 떠나 유럽에 온 것도 당연히 자의가 아니었다. 1738년 생후 겨우 한달이 됐을 때, 클라라의 엄마는 클라라의 눈앞에서 사냥꾼들에게 살해되었다. 고아가 된 클라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임원이었던 얀 알버르트 시흐테르만에게 입양되었고, 다시 시흐테르만은 네덜란드의 선장 다우어 마우트 판데르메이르에게 클라라를 팔았다. 판데르메이르 선장은 장삿속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인들이 아시아 동물에 대해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지 알고 있었기에 유럽에 클라라를 데려가면 돈벌이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클라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코뿔소의 외뿔이 전설의 동물 유니콘을 연상시키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롱기의 그림 속 클라라의 모습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클라라의 뿔은 콧등 위가 아니라 판데르메이르 선장 조수의 손에 들려 있다. 클라라의 뿔은 베네치아에 오기 전인 1750년 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유럽의 귀족들이 유니콘의 뿔로 만든 술잔을 갖고 싶어 했다는 사실과 연관 있는 건 아닌지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듯 뿔이 잘린 채 볼거리로 전락한 클라라는 1758년에 눈을 감았다. 야생에서 인도코뿔소는 40년을 살지만, 클라라는 그 반절만 살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하지만 생애 내내 낯선 곳으로 쉴 새 없이 끌려다녀야 했던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클라라는 그나마 오래 산 편이었다.
동물권 말할 때조차 인간종 중심인
지금의 우리와 뭐가 그리 다를까
이렇게 한쪽에서 야생동물들이 인간종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전시될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가축들이 인간종의 미각에 봉사하기 위해 대규모로 도륙당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아르천(1508~1575)의 <푸줏간>은 동물이 제물이 된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림 전면에는 갓 도살된 듯한 날고기들이 적나라하게 진열돼 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껍질이 벗겨진 소머리. 피투성이로 관객을 직시하는 소의 눈을 보는 순간 우리는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음식물 정물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고기들은 일단 음식물이지만 그 이전에 살아 있던 생물을 난도질한 ‘주검의 모음’이라는 것도 분명 알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도살은 무고한 동물들에게 행해진 것이기에 기독교적 수난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종교적인 교훈을 주는 용도로도 쓰였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한 상점 달력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크나큰 즐거움으로 돼지나 송아지를 잡는 자여, 주의 날이 오면 그의 심판대 앞에 네가 어떻게 서 있을지를 생각하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적어도 옛사람들은 인간과 동물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즉 양쪽 다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지닌 ‘생명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사람은 육식을 즐기지만 막상 고기가 죽음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다행히도’ 현대의 공장식 농장은 동물의 죽음을 인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예를 들어 태어나자마자 인간에게 젖을 빼앗긴 채 상품으로 키워진 소의 최후는 이렇다. 금속 나사못이 장착된 볼트건으로 머리를 관통당한 후 뒷다리 하나만 잡힌 채 공중에 올려진다. 이내 목이 잘리고 낱낱이 해체되어 ‘고기’가 된다. 이처럼 고기라는 용어는 소, 돼지, 닭의 개별적 삶을 지우고, 축산업 공장 시스템은 우리 앞에서 ‘살아 있던 것’의 죽음을 효과적으로 감춘다. 여기서 동물은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다. 과연 17세기 데카르트의 그 태도와 무엇이 다를까. 공장식 축산업에서 동물은 여전히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하며 그들의 비명은 ‘톱니바퀴의 소음’일 뿐이다.
그래도 최근,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 동물에게도 동물권이 있다는 주장이 시나브로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동물권을 이야기할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종’ 중심적이다. 침팬지 부이(1967~2011)의 삶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부이는 특별한 침팬지였다. 수어를 통해 인간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태어난 부이는 영장류의 언어 습득을 연구하던 로저 파우츠에게 수어를 배웠다. 부이는 파우츠에게 별명을 붙이고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할 정도로 수어를 사용했지만, 파우츠와 헤어진 뒤 뉴욕 소재 영장류연구소에 약물실험 대상으로 가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13년이 지난 뒤 방송사의 지원으로 둘은 재회했는데, 부이는 미안함으로 자책하는 파우츠를 반갑게 맞아주고 수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며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방송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대중들은 부이를 풀어주라고 요구했고, 여론에 힘입어 부이는 비영리 동물대피소로 옮겨진 뒤 거기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 같다. 그러나 <짐을 끄는 짐승들> 저자 수나우라 테일러는 책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침팬지에 대한 끔찍한 취급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그가 수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는 듯하다. 마치 그 능력이 그를 더욱 동정받을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침팬지 자체보다는 ‘인간적’ 특징을 지닌 존재를 감금하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테일러는 언어를 사용하는 등 인간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는 동물에게만 해방될 자격을 주는 지독한 ‘종 차별주의’를 통찰해낸 것이다.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이렇게 얘기했다. “중요한 질문은 동물들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가, 말을 하는가가 아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낄 줄 아는가이다.” 맞는 말이다. 비건 활동가 캐럴 애덤스의 말대로 “정의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장벽에 갇힌 취약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피에트로 롱기, ‘베네치아에서 열린 코뿔소 전시회’, 1751년께,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다 숨진 코뿔소

피터르 아르천, <푸줏간>, 1551년, 목판에 유채, 스웨덴 웁살라대학 구스타비아눔박물관.
지금의 우리와 뭐가 그리 다를까
생물 난도질한 ‘주검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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