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떤 이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세상의 어떤 이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사랑하고) 싶다. 그런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먼 훗날 우리를 정확히 죽게 할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하 인용문 같은 책
평론은 독자에게 문턱이 높은 장르다. ‘무엇’에 대해 쓴 ‘무엇’을 해석하는 글이어서다. 문학에 대해 쓴 글은 더욱 그렇다. 놓쳐버린 영화의 미장센이나 복선을 궁금해하는 관객은 있어도, 스스로 기어이 읽어낸 문학작품의 의미를 두고 누군가의 해석에 기대는 독자는 많지 않다. 그러니 ‘독자에게 사랑받는 문학평론가’는 형용모순이다.
2005년 <문학동네> 봄호에 소설 평론을 발표하며 등단한 뒤 꾸준히 문단과 대중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평론가 신형철(46)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남다른 데가 있다. 쓰는 일과 강의하는 일 말곤 외부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다. 흔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하지 않는데, 독자가 알아서 그를 찾는다. 3~4년에 한 번꼴로 낸 그의 평론집과 산문집은 대개 20쇄를 넘겼다. 쉽게 쓰인 위로의 말들이 부유하는 출판가에서 문학을 매개로 “인간을 탐사하고자 하는”, 이 무겁고 단단한 글들이 사랑받는 것은 우리가 아직 문학이라는 질문을 놓지 않았다는 징후이므로 반가운 일이다.
신형철의 글은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우선 사랑받는다. 그가 나타났을 때 한국 문단은 “비평이 더 이상 창작에 열등감을 갖지 않게”(권혁웅 시인) 됐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의 문장을 다시 읽을 때 독자는,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정확한’ 문장이다.
“최상의 산문 문장은 고통도 적확하게 묘파되면 달콤해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장”이라고 신형철은 적은 바 있다.
‘정확함’은 신형철의 세계관 그 자체다. 그는 “정확한 칭찬”만이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고 적었거니와, 슬픔에도 ‘정확한 인식’에 따른 ‘정확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썼다. 정확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뾰족수가 없다. 작가는 말한다.
“한번 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서 보고 또 본다. 보일 때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신형철의 글쓰기는 ‘영감의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보단 가장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 본질에 정확히 가닿기 위해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에 충실한 글쓰기라고 해야겠다. 그를 잘 아는 한 출판사 편집자는 “그는 글 장인이다. 그렇게 퇴고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SNS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작가, 유튜브 영상도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작가. 신형철을, 17일에 걸쳐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몰락의 에티카> 출간 당시, 읽고 쓰는 일이 선생님 삶의 거의 전부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왜’ 글을 쓰시나요?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라는 말을 10년도 더 된 책에 적었을 때 저는 지나치게 비장했어요. 지금 보면 저 문장에 ‘거의’라는 부사를 가까스로 넣어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런데 지금도 비장 취미는 남아 있어요. 그게 남들한테는 조롱거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요. 제가 제법 그럴듯하게 해내는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글쓰기뿐이기 때문에, 이거라도 비장하게 하지 않으면 제 삶이 너무 가벼워지고 말 것만 같아서겠지요.”
-선생님께 몸을 움직여 글을 쓰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제가 하는 일이 좋게 말해 정신노동에 속한다는 것, 그러니까 육체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자괴감을 가지고 있어요. 근면한 육체노동자이신 아버님이 사위가 하는 일을 대단한 것으로 여겨주실 때는 더욱 그렇고요. 읽고 메모하고 상념에 잠기는 일이 좀더 번듯한 노동처럼 보일 수 없을까 마음이 쓰여요. 몸을 움직여 글을 쓰는 것은 제 직업의 공정 중에서 가장 나중 단계이자 유일한 육체노동이죠. 표현은 익스프레스(express)잖아요. 밖으로 찍어내는 일. 이 프레스 작업이 제일 어려워요. 어쩌면 제가 글쓰기의 그 마지막 단계를 그토록 악착같이 미루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알량한 육체노동마저 하기 싫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처음부터 평론을 쓰고 싶어 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10대 시절에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도 평론 쓰는 일을 상상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아무래도 ‘장래 희망’ 자리에 ‘평론가’라고 적는 10대 소년이 있다고 상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가봐요.(웃음) 막연하게나마 아주 훌륭한 독후감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에요. 언제나 칭찬받았던 게 그걸 했을 때거든요. 타인의 칭찬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해요.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제 역할도 그런 거예요.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칭찬을 해주기.”
-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흠칫 놀라실 때도 있나요? ‘이 녀석 이렇게 좋은 글을 썼어?’라고.
“가끔 그런 학생들이 있어요. 제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인생의 천재’라고 할 만한 이들이요.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싶은 그런 깊이에 닿아 있는 경우죠. 그런 학생 중 몇몇은 문학에 이상할 정도로 초연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어느 날 제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곤 했어요.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역할에 대해 말하기도 했지만, 그 몇몇을 생각하면 미안해져요.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칭찬을 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요.”
신형철의 글이 일반 독자에게 깊이 사랑받는 것은 섬세하고 적확한 언어, 해박한 지식의 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짧은 글에서도 단숨에 인간성의 심연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통찰 덕택이다. ‘비평의 개념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평론가 조지 스타이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같은 글을 한 문단만 쓸 수 있었다면 절대 그에 대한 비평을 쓰고 있지 않을 거”(<오리지널 마인드>)라고 썼다. 비평가의 운명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모세의 그것”(남진우)이라면, 신형철은 왜 시나 소설을 쓰지 않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창작에 ‘한눈’(?)팔지 않고 성실한 해석자의 길을 걸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창작에 한눈팔지 않는 것은 그래 봤자 칭찬보다는 욕을 먹을 가능성이 커서겠죠.(웃음) 제가 비평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데 제일 멋없는 답은 이런 거예요. 제 삶에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타인의 삶에서 그걸 찾아낼 만큼 관심의 에너지도 없고요. 그러니 이와는 다른 자극이 주어져야만 하고 그게 작품이겠죠. 작품에 대해선 경탄과 실망을 다 경험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탄의 에너지가 저를 움직여요. 왜일까.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저는 사랑할 줄 아는 능력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는 유형인지도 모르죠.”
-다른 작가들과 달리, 평론가에겐 쓰는 일이 곧 읽는 일이고, 읽어나갈 때 이미 쓰기를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읽기 과정에서는 ‘사랑’에 빠졌다가, 쓰기 과정에서는 ‘정확’한 해석과 논리로 인식해 쓰는 일을 하시는데요. 그 두 작업이 때로 상호 충돌하는 일은 없을까요?
“그 둘은 저에게 충돌하기보다는 선순환하는 항(項)들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정확히 표현하고 싶어지고, 정확히 표현됨으로써 대상은 사랑받을 만한 것으로 입증되니까요. 이 과정을 통해 대상도 표현도 모두 유일무이해지는 것이죠. 개츠비의 미소를 묘사한 피츠제럴드의 문장 같은 것 말이죠. “잠깐, 전 우주를 직면한 뒤에,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라고 적혀 있어요. 이런 건 묘사라기보다 거의 생포죠. 덕분에 개츠비의 미소는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고요. 제 글쓰기의 동력은 이런 거예요. 정확한 문장으로 대상을 생포하는 일.”
신형철은 글짓기를 집짓기에 비유한다. 이 공정의 준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흡사 ‘인식의 대목장’ 같은 그의 장인적 태도가 드러난다. 첫째, “취향이나 입장이 아닌”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셋째,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해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비평은 그 어떤 글짓기보다 정교한 언어의 집을 짓는 일일 텐데요. 많이 읽고 쓰는 일 외에, 선생님이 비평가로서 반복적으로 훈련한 일도 있을까요?
“비평가로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중 하나는 시를, 그것도 젊은 시인들의 시를 포기하지 않는 연습이에요. 자주 받는 질문이 있어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려워서 모르겠다, 왜 이런 것이냐. 그런데 시는 원래 어렵고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언제나 어려워요. ‘젊은 시인들’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나이의 독자에게는요. 그러나 또래들끼리는 공감하며 읽잖아요. 이때 내가 포기하면 복수심이 생겨서 대상을 비난하고 싶어져요. 저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유혹을 느낄 때가 많고요. 내가 즐길 수 없더라도 그게 대상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반복해서 되새기지 않으면 잊고 말아요.”
-아무래도 학생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2014년 조선대에 부임한 뒤엔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보통 어느 정도로 글을 쓰나요?
“2021년의 경우 논문 1편, 평론 1편, 한 달에 하나씩 쓴 칼럼 12개, 그 밖에 몇 개의 추천사들. 이 정도예요. 한심한 수준이죠. 그렇다고 어디 불평할 곳도 없어요. 학교 일을 소홀히 할 수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더 줄일 수도 없으니까요.”
-작가들에겐 고유의 루틴이 있지요. 헤밍웨이는 스무 자루의 연필을 깎아둔다고도 말했는데요. 선생님께도 루틴이 있나요.
“저는 ‘루틴’이란 단어가 아직도 입에 잘 붙지 않을 정도로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에요. 물론 제 일상에는 형식이 있어요. 인생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고, 아니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있지만, 글쓰기에는 그런 게 없어요. 어디서든 멈춰 서서 메모를 쌓다가 벼랑 끝에 몰리면 밤낮없이 써요. 루틴이 있다는 건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뜻일 텐데, 그게 없다는 건 제 생산라인이 불안정하다는 뜻이겠죠. 책 네 권이 그렇게 나왔어요. 이건 가족에게도 미안한 일이죠. 이런 사태를 청산해보려고 최근에 마련한 작업실이 바로 이곳이에요.”
그는 최근 글쓰기를 위해 학교도, 집도 아닌 곳에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작업실이다. 아직 이사한 지 며칠 안 된 작업실은 책장과 책상만으로 이미 빽빽하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에이포(A4)용지를 붙들고 준비 중인 글의 얼개를 정리하곤 한다. 그는 이 백색의 썰렁한 종이와 네임펜을 “연장”, 작업실을 “인식을 생산해내는 곳” “공장”이라고 불렀다. 과연 ‘대목장’이다.
-글 쓸 때 선생님은 어떤 모습인가요?
“보다시피 제 작업 공간은 화려하지도 운치 있지도 않아요. 삭막한 사무실이거나 너저분한 공장이에요. 예쁜 문장을 적어나가는 곳이 아니라 인식을 생산해내는 곳이니까요. 저에게 우아한 루틴이 없듯이 제 작업과 관련된 특별한 소품도 없어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웃음) 소품이 아니라 연장이 있죠. A4용지와 네임펜 같은 것. 줄 없는 흰 종이여야 해요. 메모 자체가 설계도처럼 구조를 얻어나가니까 공간이 넓어야 해서요. 그리고 네임펜은 노안이 온 뒤부터 즐겨 써요.(웃음) 옅은 펜으로 쓰면 제가 메모한 생각마저 허약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광주광역시 남구에 마련한 신형철 작가의 작업실. 책장으로 가득 차 발 디딜 곳도 여의치 않다. 김진수 선임기자
-방대한 문헌들을 보실 텐데, 필요한 문장이나 자료를 아카이빙해두는 선생님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적재적소에 적절한 문장을 인용하는 능력은 정말 부럽죠. 아주 옛날에는 책에서 밑줄 친 문장만 따로 어딘가에 적어놓기도 하고 그랬어요. 오래 못 가더라고요. 하나라도 더 읽어야 해서 읽은 걸 정리할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인용문을 너무 소중히 품고 있으면 글이 그걸 살리기 위해 움직이게 돼요.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죠. 이제는 일단 인상적인 문장이 있으면 머릿속에 궁서체로 적어두고 나중에 운 좋게 떠오르기를 바라는 식이에요.”
글이 잘 넘어가지 않는 순간이 그에게도 있다. 그럴 때도 그는 스스로에게 준엄하다. 신형철은 “제 경우 글이 막힌다면 그건 무슨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준비 부족의 냉혹한 귀결일 뿐일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럴 때 그는 작품이나 자료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처음인 듯 들여다본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탁 끊듯이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헤치는” 방식이다. 흥이 나지 않아 쓰기 싫어질 땐 “클래시컬한 명문들을 읽는다”고 했다. 그가 존경하는 비평가들이다. 최근엔 서영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왜 읽는가>), 황종연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명작 이후의 명작>)의 신작을 읽는다. “클래식이 원래 함대라는 뜻이잖아요. 두 분 책을 읽고 있으면 거대한 함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듯 압도돼요. 질투는 오히려 방해되기 때문에 질투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이 필요하죠.”
-‘나의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독자에게는 지침이 될 만한 글이 중요한데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주신다면요.
“글쓰기를 막 시작하려는 독자에게는 에세이를 권하고 싶어요. 에세이가 제일 쉬운 장르여서가 아니라, 생각이 문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더 투명하기 때문에 관찰하고 배우기 좋을 것 같아서예요. 윗세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듀나의 에세이들. 최근 사례로는 이슬아, 요조 같은 분들의 글이요. 생각이 문장으로 전환될 때 그 사이에 끼어들게 마련인 어떤 비계 같은 게 전혀 없어요. 정신과 육체 사이의 언문일치가 이뤄진 세계 같다고 할까. 저는 그렇게 못 써요. 김훈과 고종석의 1990년대 글을 읽으며 문장의 매혹을 느낀 세대니까요. 그 문학적 문어체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정확할 뿐 아니라, 삼엄하리만치 살뜰하게 텍스트를 읽어내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특히 해석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뭘까요?
“이것도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는데… 최근에 어떤 분이 한 작가를 두고 ‘유명해지기보단 유일해지고 싶은 것 같다’고 쓰신 것을 봤는데, 그 표현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맞아요, 그런 태도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유일하다는 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니까요. 많이들 하는 얘기지만 무난한 글이 가장 안 좋은 글이죠. 그런 글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유일한 존재가 되기는 어렵겠죠. 저도 명심할 일이고요.”
-비평할 때 이런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누군가 거기에 있다. 여하튼 있을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저런 부류는 도대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존재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이만이 그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것이다.”(<몰락의 에티카>) 늘 텍스트를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며 읽으시는데요. 그런 선생님께도 마음속 작가가 있나요?
“문장에도 사운드가 있는데, 어떤 내용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그 사람이 쓴 문장은 언제나 좋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죠. 문장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사운드로 들린다고 할까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이 중에도 몇 있어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제 마음속에만 두겠습니다.(웃음)”
신형철 작가는 글을 쓰기 전 백지에 두툼한 네임펜으로 얼개를 적어둔다. 김진수 선임기자
-선생님껜 문학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의 영토와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칼럼니스트)의 영토가 있습니다. 두 종류의 글에 깃든 온도가 다르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의식적인 거리인가요?
“짧은 글에선 한 문장도 낭비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차가워지는 듯도 해요. 그런데 더 중요하게는 칼럼이 현실의 사안을 직접 다룰 때가 있고 그게 대체로 ‘권력의 일’이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문학작품을 읽을 때 해석자는, 조너선 컬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도로 유지되는 협력 원칙’에 근거해서 접근하죠. 이 작품은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말한다고 전제하고 그걸 찾기 위해 협력하는 독서를 해요. 그러나 권력의 언행 앞에서는 다른 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겠죠.”
-제18대 대선 직후 <한겨레21>에 김승희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희망은 종신형”이라고 쓰셨어요. “대통령은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쓰신 것도 기억나고요. 문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에겐 보수정권 당시의 외상도 있을 텐데요. 선거 결과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나요? 지금 선생님 마음속에 어떤 문장들이 있나요?
“희망에 대해 몇 번 쓴 적이 있어요. ‘삶에 희망이 있다는 것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건 김연수 작가에게서 배운 것이죠.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건 김수영 시인에게서 배운 것이고요. 얼마 전에 리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뒀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인과론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가정하지만,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건 서둘러 옆걸음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관계를 깨뜨리는 지진이다.’”
-요사이에는 어떤 공부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히 관심 둔 분야의 저작이 있는지요?
“근래의 관심사는 돌봄이에요. 어떤 계기가 있어서 자주 자문해요. 나는 과연 누군가를 돌볼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고. <인간 실격>이라는 책 제목이 있잖아요. 저것은 ‘인간 자격’에 대한 질문 같아요.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돌봄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적 이슈이기도 하죠. <돌봄 선언>을 읽었는데 저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종의 구별 없이, 배제와 차별 없이, 닥치는 대로 돌봐야 한다고 주장해요. 저자들의 강렬한 표현을 빌리자면 ‘난잡한 돌봄의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동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어렵죠.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