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밴드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멤버 배미나(36), 김명진(34)씨가 12일 대구 중구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주빈 기자
“올해 초 소식을 접했어요. 성폭력 가해자들이 있는 밴드가 서울에서 다시 공연을 한다고. 3~4년 전 밴드 멤버에 대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폭로 뒤 공연장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다시 나타난 거죠.”
인디밴드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에서 베이스기타를 맡고 있는 배미나(36)는 “그 공연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해당 공연 소개글이었다. 거기에는 ‘다름’과 ‘차별’ 등이 언급돼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는 숨어 지내는데 가해자들이 겉멋 든 공연 소개를 하면서 복귀하는 걸 지켜보기 힘들었어요.”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이 ‘인디신 내 성평등을 위한 여성 록 아티스트 연합공연―음악에는 성별이 없다’를 기획한 계기다. 이 밴드 멤버 배미나, 김명진(34)을 지난 12일 대구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공연에는 이 밴드를 비롯해 빌리카터, 사막꽃, 혼즈 등 네 팀이 참여한다. 밴드 멤버 가운데 남성도 여럿이다. 이들은 모두 페미니즘과 공연의 가치에 공감해 공연 섭외에 바로 응했다. 섭외는 순조로웠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쳤다. 공연 사실이 알려지자 다양한 방식으로 압력이 들어왔다. 김명진(드럼)은 “에스엔에스(SNS) 팔로어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공연에 참여하는 한 남성 멤버는 ‘너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참 안타깝다’는 메시지를 공연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밴드 멤버에게 받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인디음악계에서 ‘성평등’에 목소리를 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비난에도, 억지 주장에도 맞서야 한다. 김명진은 “공연장에서 관객들의 그림을 그려주는 이벤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때 함께 공연하는 다른 밴드의 남성 멤버가 ‘성행위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자’고 제안했다. 그건 여성에게 폭력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하니 ‘서브컬처(하위문화)를 알지도 못하면서 탄압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결국 여성 멤버들의 반대로 해당 이벤트는 이뤄지지 않았다.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이 지난해 3월 대구 클럽 헤비에서 공연하고 있다. 채종찬 사진작가 촬영.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제공
이들이 밴드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페미니즘과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중시했던 건 아니었다. 수많은 경험과 계기들이 있었다. 배미나는 “2012년부터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으로 활동했는데, 처음에는 인디음악계에서 성폭력적인 발언을 들어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때론 거기에 동조하는 식으로 내가 들은 말의 불편함을 잊으려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 심한 성폭력이었다. 배미나는 “속옷만 입고 공연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걸 모른 척했더니 나중에는 본인의 성관계 영상까지 보여줬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느낀 순간”이라고 했다.
김명진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고서 많은 여성들이 ‘각성’하기 시작할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 뮤지션들이 여성 관객의 외모를 언급하거나 ‘꽃’으로 부를 때도 불편한 기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페미니즘을 접하고 왜 그게 잘못됐는지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경험과 각성은 창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7년 행정안전부가 나서 ‘가임기 여성지도’(출산지도)를 만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임기 여성=저출생 타개 도구’로 보는 인식에 여성들이 분노했을 때,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은 ‘I Am Not A Machine’(난 기계가 아니야)이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인디밴드 공연장 안팎에서 음악가와 관객 사이의 거리는 좁다. 남성 뮤지션들은 쉽게 여성 관객에게 신체 접촉을 한다. 공연 뒤풀이에 관객들을 초청하는 일도 자연스럽다. 건강하지 못한 접촉은 성착취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의 공연은 다르다. 배미나와 김명진은 “좀 시끄러울 순 있지만 초등학생이 와도 안전한 공연”이라고 설명한다. 공연에 앞서 ‘공연 내 관람매너’를 배포한다. “공연 특성상 신체 접촉이 있을 수 있지만 언제나 서로 간에 합의가 된, 폭력적이지 않은 선이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성폭력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용납되지 않는다. 가해자는 즉시 퇴장 조처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안전하고 성평등한 공연을 위해서다.
‘음악에는 성별이 없다-인디씬 내 성평등을 위한 여성 록 아티스트 연합공연’을 홍보하며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성평등한 인디음악계를 위한 행동강령’.
이번 공연도 다르지 않다. 공연을 홍보하면서는 ‘성평등한 인디음악계를 위한 행동강령’도 함께 알리고 있다. 문화계 내 성폭력 반대 운동, 미투 운동 등을 거치면서 2019년에 만들어진 ‘예술계 내 행동강령’ 가운데 일부다.
“성폭력 가해자가 어느 날 전화를 해와서 ‘미나야, 그래도 펑크는 미워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그저 웃음이 나왔죠. 펑크는 저항정신에서 나온 음악이에요. 한마디로 ‘문화를 바꾸는 문화’인 거죠. 시대마다 ‘바꿔야 할 문화’에 대한 주제는 다르겠지만 결국 기조는 같아요. 누군가는 머물러 있는 사이, 누군가는 바뀌며 앞서나갑니다.” 공연은 오는 25일 저녁 7시30분 서울 마포구 ‘채널1969’에서 열린다.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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