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의 한 장면. 에피퍼니 제공
46년 만이다. 관객에게는 영국 아드먼 스튜디오의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로 눈에 익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제작되어 극장 개봉하는 건 1977년 <콩쥐팥쥐> 이후 처음이다. 하루 종일 찍어야 러닝타임 10초를 채우기 힘든 시간과의 싸움, 말 그대로 모든 걸 손으로 빚어내야 하는 고된 노동이 필요한 작업인 탓이다. 컴퓨터만 있으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무모한 용기로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을 극장에 도착시킨 이는 박재범(32) 감독이다.
“기술 발전으로 3D 애니메이션이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면, 스톱모션은 컴퓨터그래픽과는 다른 질감이나 물성을 통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매끄럽지 않은 불완전함이 주는 아날로그적 아름다움이 크고요.” 지난달 28일 <한겨레>와 전화통화로 만난 박재범 감독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홍익대 미대에서 공부한 그가 대학 졸업작품으로 만든 <더미: 노웨이 아웃>은 그의 첫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이후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하다가 2018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본격적으로 스톱모션 애니 작업에 빠져들었다. 회사에서 만난 아내 이윤지(31) 감독도 그의 아카데미 후배로 현재 함께 작업을 해오고 있다. 두 사람은 작품을 할 때마다 다양하게 역할을 분담하는데, 이번 영화에서 이윤지 감독은 미술감독과 그리샤 역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의 한 장면. 에피퍼니 제공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눈보라 몰아치는 툰드라 땅을 배경으로 원인 모를 큰 병을 앓게 된 엄마를 구하기 위해 소녀 그리샤가 동생과 함께 전설로 내려오는 숲의 주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박 감독은 <에스비에스>(SBS)에서 2010년 방영했던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툰드라>를 보고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아름답고 충격적인 다큐였어요. 자연에서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죠.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툰드라 사람들의 삶이 아날로그적인 스톱모션으로 표현하기에도 좋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의 한 장면. 에피퍼니 제공
전체 제작 기간은 3년3개월이 걸렸고 촬영만 1년4개월 걸렸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제작 지원을 했고, 한정된 시간과 예산 안에서 완성하기 위해 대본을 쓰고 캐릭터 디자인을 하고 세트 만드는 작업을 동시에 해야 했다. 등장인물 10명을 완성하기 위해 15개의 인형을 만들었고 한국어 발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아에이오우’ 발음별로 입 모양을 만들었다. 또 인형들의 풍부한 감정 연기를 위해 눈썹과 입 모양을 경우의 수별로 조합한 얼굴 세트 60여개를 제작했다. 한국에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전통이나 전문 제작사가 없다 보니 모든 과정이 실험에 가까웠다. “오로라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오로라가 마치 비단 같은 질감으로 보인다는 데 착안해서 서울의 남대문시장 같은 부산진시장을 뒤졌죠. 비슷한 질감의 천을 수십 종류 떼다가 일일이 조명을 쏘고 촬영해서 오로라의 질감에 가장 적합한 미색 실크를 찾아냈어요. 이처럼 거의 모든 장면이 새로운 재료들의 실험에 가까웠죠.” 다행히도 지난가을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완성에 매달린 박 감독 부부와 스태프들의 고생은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호평으로 이어졌고 일반 관객과도 만날 수 있게 됐다. 박재범 감독은 통화를 마치며 “한국 사회와 문화를 배경으로 가족이 같이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물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에피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