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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기를 헤쳐온 르네상스인 박·용·구

등록 2006-05-10 20:48수정 2006-05-11 11:32

위 왼쪽부터 평양고보 2학년 시절 스케치연구회 회원들, 미군정청 예술고문 헤이모위츠가 1947년 찍은 예술인 모임과 같은 날 찍은 기념사진(왼쪽 세번째가 월북 작곡가 김순남), 1950년대 일본 도쿄 고마키발레단 문예부장 시절 제작진들과 함께. 박용구 선생의 사진첩에서.
위 왼쪽부터 평양고보 2학년 시절 스케치연구회 회원들, 미군정청 예술고문 헤이모위츠가 1947년 찍은 예술인 모임과 같은 날 찍은 기념사진(왼쪽 세번째가 월북 작곡가 김순남), 1950년대 일본 도쿄 고마키발레단 문예부장 시절 제작진들과 함께. 박용구 선생의 사진첩에서.
현대무용극 ‘신 춘향’ 쓴 92살 현역 예술인
“이때에 그립고 그리던 이도령이 나타난다. 그런데 웬일인고, 변사또는 이도령을 보자 몽유병자가 되기나 한 것처럼 허위허위 그에게로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닌가. 살결 희고 눈썹 짙은 이도령은 남색의 상대로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십장년의 건장한 변사또는 사나이로 부족함이 없고 보니 은근한 텔레파시가 오고간들 놀랄 것도 없으련만 ….”

최근 유럽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신작 〈신 춘향〉 대본 중 변사또와 이도령의 동성애를 묘사한 대목이다. 아무리 ‘파격의 안은미’라지만 춘향전에 동성애라니 ….

이 대본을 쓴 이가 올해로 아흔두살인 원로 예술가 박용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한번 더 놀라게 된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토록 유연하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니.

박용구는 말 그대로 우리나라 예술계의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존재다. 월북 인사들인 김순남(작곡가), 설정식(시인), 납북 시인 정지용 등과 교유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제작한 기획자,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쓴 음악평론가이자 무용평론가, 오페라·연극 연출자, 작가, 방송인 등으로 활동한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20여권의 저작을 발표했으며, 지금도 작품을 쓰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그는 새벽잠이 없는 보통 노인들과 달리 밤 11시에 자고 오전 11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건강 비결은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물구나무를 비롯한 준비운동을 하는 것”이다. 벌써 55년이나 된 습관이다. “사람이 원체 짐승에서 진화했잖아요. 네 발로 기어다니다가 한 2만년 전에 똑바로 서서 다리로 걷게 되니까 몸에 무리가 생기겠죠.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한 30분을 누워서 몸을 풉니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공연을 본 날짜와 내용을 꼼꼼히 적어놓을 정도로 메모광이기도 하다. 그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린 20세기 예술을 돌아보고, 1세기의 지혜로 내다본 미래 비전을 들어본다.

글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무용가 안은미가 말하는 박용구 선생
“내 청년기 지배한 거역할 수 없는 전설”

내가 박용구 선생님을 가까이 하게 된 동기는 아주 간단하다. 대학 시절(82학번)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매일 밤 시간을 함께한 나의 친구 박화경의 아버지셨다. 이 사소한 인연은 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실마리였다.

첫 만남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 그리 낯설고 섬뜩하던지…. 마치 이방인의 발걸음처럼 그분은 세상 밖에 존재하는 사람의 걸음 속도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칠순이 넘은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세월의 무게는 갓 스물이 지난 나의 직관력으로 이해하기엔 너무나 낯선 다른 세계의 언어였다.

한 세기의 어둡고 추운 역사를 체득한 경험의 목소리는 늘 거역할 수 없는 전설이 되어 나의 청년기를 지배했다. 당시 무용전문지 〈춤〉에서 달마다 연재했던 선생님의 좌담 코너는 내게 교과서보다 유익한 지침서였고, 어쩌다 함께 나누는 한 잔의 차는 생명의 포도주와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물이 오염되었을지언정…. 그 찬란한 구술의 역사.

선생님을 뵐 때마다 나는, 좋은 세상은 어른이 함께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어른 앞에서 감히 목청을 높였다. 흔들리는, 보잘것없는 나뭇가지에 바람을 멈추게 하는 지혜와 힘. 진짜 어른이 누군지 모르는 세상 앞에선 더욱 더 간절하다.

난 늘 그분 앞에서 무릎꿇고 앉아 경청하는 시간의 고통을 사랑한다. 습파리(習破離, 습은 따라 배우는 단계를, 파는 파격을 행하는 시절을, 리는 새로운 일가를 이루는 완성의 단계를 말한다). 예술가가 가야 하는 세계관을 한마디로 내게 가르쳐주신 선생님.

“예술가는 한 작품을 남기고 가는 거야.”

멋모르고 날뛰는 젊은 아이에게 그 한 말씀은 지금도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기다려야지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선생님은 서두르지 않고 세월을 이고 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김치처럼 발효되는 시간만큼 숙성된다는 효능을. 짧은 지면으로 못 다한 말을 선생님의 이 문구로 대신한다.

“‘사람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한반도의 전근대 역사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민중항쟁이 가장 많았던 고려시대에, 노비 출신의 반란 주동자 만적이 외쳤다는 말. 이른바 ‘삼별초 의 난’으로 불리는 대규모의 무력항쟁도 계급사회의 모순에 대한 인간선언을 바탕에 깔고 있으나, 폭력적 권력에 대한 도의적 권력의 조직적이고 한 차원 높은 도전과 좌절로 보면, 그 비극은 더욱 심화된 역사적 재조명이 가능하지 않은가. 이웃나라끼리 서로 바라볼 수 있어서 닭 울음소리와 개 짓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동체적 도시국가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는 세상이 오면 혹시나 진정한 평화가 올까…. 구십 노인이 인간족의 후손들을 생각해서 꾸는 꿈이요, 기원이다.”(심포닉 아트 〈삼별초〉 작품 노트 중에서)

안은미무용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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