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스쿨의 졸업 패션쇼를 대서특필한 영국 일간 신문
강주연 패션 어드벤처
신문은 무섭다. 어쩌다 신문에 이름 석자라도 나면 잊었던 옛 애인이나 초등학교 동창생까지 연락을 해 올 정도니 말이다. 대중의 생각을 이끌고 움직일 수 있는 게 신문이고 그래서 신문의 힘은 대단하다.
그 신문의 힘과 실력이 유난히 센 나라가 영국이며, 그들이 정기적으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패션 칼럼이다. 프라다 그룹이 질 샌더라는 브랜드를 사들였느니, 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톰 포드가 구치와 결별하게 되었다느니 하는 식의 좀더 깊이 있는 - 그러니까 패션을 분명한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하는 시각의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패션계의 명문학교인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의 졸업 작품 쇼를 일간지들이 매년 앞다투어 비중 있게 보도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이 학교가 전세계 패션의 산실로서 인정받고 있다고 쳐도 학생들의 졸업 작품 쇼에 대해 그 정도의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은 놀랍다.
런던은 사실 1960년대 ‘모즈’(Mods)라는 독특한 스트리트풍을 전세계에 유행시킬 때를 제외하고는 패션에 서는 파리나 밀라노에 비하면 변방이었다. 패션의 산업적 기반도 미비했으며 그렇다고 뉴욕 패션계처럼 돈과 물량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런던 패션이 가지고 있는 재주는 오직 사람, 즉 인재뿐이었다.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을 발굴하여 그들을 알리고 세계적으로 키워주는 데에 영국 신문들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여기에 90년대 토니 블레어 정부까지 힘을 합쳐, ‘크리에이티브 브리튼’을 내세우며 패션을 비롯한 각종 문화 콘텐츠와 디자인 산업을 국가적 차원으로 육성해 왔다. 이런 영국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대중 매체의 적극적인 도움 속에 패션 산업은 고부가가치를 일으키는 대표 ‘효자 산업’으로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가 인식하는 패션 산업이란 아직까지도 직물을 원료로 하는 1차원적인 제조업이거나 혹은 아예 호화 사치 산업이라는 인식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 영화 산업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돌이켜 보자. 과거엔 아무도 영화를 ‘산업’의 하나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정부도 대중도 영화 산업의 놀라운 수익성을 인정하고 고부가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영화 산업에 대해 지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봄바람이 부니 스카프를 매세요’ 따위의 초등학교 수준의 기사나, 모델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스루’ 룩 사진 한 장으로 남성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고작이었던 우리 일간 신문들의 패션 칼럼을 돌이켜 볼 때, 요즈음 영화 전문지 수준으로 성장한 일간지들의 영화 칼럼은, 패션계에 적을 두고 있는 필자로서는 얄미울 정도로 부러울 따름이다.
영화가 할 수 있는데 패션이라고 못할 건 없다. 어차피 우리가 가진 자원이라곤 사람뿐이고 그거라면 꽤 자신도 있다. 남은 일은 우리에게 재능 있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많이 자라나는 것과 그리고 그 재능들이 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 그 일을 신문과 대중이 할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패션이 ‘밥 먹여 줄’ 날도 오리라.
<엘르> 패션 디렉터 강주연
잡지 〈엘르〉의 패션 디렉터 강주연(34)씨의 칼럼 ‘패션 어드벤처’를 오늘부터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합니다. 강씨는 디자이너로서 대기업에서 3년간 일하고,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에서 2년 동안 유학하는 등 패션과 관련한 다양한 경력을 쌓은, 젊은 패션 전문가입니다. 그는 “패션을 낯설어하는 ‘아저씨’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패션 칼럼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