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적 화해를 위한 도덕적 판관으로서 인정을 받아왔다. 하지만 지난 8월 최신작 〈양파껍질을 벗기며〉란 자서전을 통해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던 과거를 털어놓아 독일 사회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한겨레〉자료사진
기억을 벗겨내도 그 속에 또다른 껍질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희생자인가
진실과 허구 사이 경계 불분명하기에 논란
‘나치 부역’ 때늦은 고백일지라도 고백은 소중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희생자인가
진실과 허구 사이 경계 불분명하기에 논란
‘나치 부역’ 때늦은 고백일지라도 고백은 소중
안과 밖/ 귄터 그라스 ‘60년 만의 고백’ 지난 8월 중순,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자서전 출간을 앞두고 마련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나치의 엘리트 조직인 ‘무장-친위대’(Waffen-SS)에 복무하였음을 토로함으로서 월드컵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독일 사회를 뒤집어놓았다. 지금까지 그는 문학작품뿐 아니라 인터뷰, 강연 등을 통하여 자신이 2차 대전 중 대공포 조수로써 복무했다고만 밝혔을 뿐, 그 밖의 나치시대 행적에 대해서는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일단 주어진 노벨상은 취소되지 않음을 밝혔다. 폴란드의 단치히(오늘날 폴란드의 그단스크) 시의회도 그의 단치히 명예시민권을 취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의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는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초판 15만 부가 모두 팔렸나갔으며, 당사자도 이젠 과거의 모든 짐에서 벗어나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그의 이중성을 격렬히 비난하지만 어차피 그의 ‘고백’ 이전에도 적대적인 사람은 늘 그의 주변에 있었던 바이며, 그의 친구들은 변함없이 그에게 이해심을 보이고 있다. 바뀐 것은 없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귄터 그라스는 누구인가? 1927년 단치히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의 종료와 함께 독일로 넘어왔고, 1959년 소설 ‘양철북’을 통해 세계적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벨이 1972년 자신의 노벨상 수상소식이 전해지자, “왜 그라스가 아니라 나지?” 라고 되물었을 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젊은 나이에 이미 완숙해 있었다. 그는 작가로서 뿐 아니라 한 국가의 도덕교사요 판관으로도 인정받아온 인물이었다.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적 화해를 위하여 헌신해온 그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게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에 발언해 온 일국의 도덕적 파수꾼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독일의 통일과 함께 잊혀질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2차 대전이 남긴 대량학살의 ‘역사적 벌’로써 독일은 분단된 채 남아야 한다며 통일에 적극 반대하여 여론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1999년 뒤늦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사회의 전면에 부활하였고, 독일 연방공화국의 온갖 문학적, 정치적, 예술적 명성과 호사를 다 누린,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권위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밝혔던 바와는 달리 그라스는 히틀러 청년단원으로서 15살에 자발적으로 U보트 전투단에 지원하였으나 거부되었고, 17살에는 노동봉사단에 징집되었다가 몇 달 후 다시 ‘무장-친위대’ 소속의 북독일 탱크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간에서 그 시기 나치 친위대원임에 자부심을 가졌었으며, SS가 새겨진 군복이 그에게는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었고, 오히려 히틀러의 엘리트 부대원으로서 자랑스럽기까지 하였었음을 토로했다. 자신의 집안 분위기도 히틀러에 추종적이었고, 어릴 적부터 히틀러의 선전에 익숙했던 그는 어떤 의심도 없이 나치 친위대에 자원했고, 전쟁에 희생될 각오를 갖고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히틀러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었다는 것이다. 1945년 2월 말에서 4월20일까지 대전의 막바지에 경험했던 그의 짧은 전쟁은 러시아군의 수류탄 파편에 맞아 야전병원에 실려 감으로서 끝을 맺게 되며, 체코의 한 야전병원에서 미군 포로로 잡힌다. 어째서 이제야? 그라스의 고백을 접한 이들이 갖는 주된 의문은 “그는 어째서 이제야 고백하는가?” 일 것이다. “왜 이제야” 라는 물음에 그는 "내게 그것은 묻혀진 채 있었다. 나 또한 그 이유를 잘 댈 수 없다. 이 문제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늘 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작가로서, 또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해온 모든 일들이, 나치시대 어린 나를 구성했던 그런 것들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죄책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가 ‘무장-친위대’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어떤 범죄행위에도 가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를 보다 전체적인 연관성 속에서 토로해야 겠다는 욕구는 늘 가지고 있었다. 나의 심적 저항을 극복하고 난 후, 자전적 형식으로 내 유년시절을 다루면서, 이제야 토로하게 된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는 또 당신이 좀 더 일찍 털어놓았다면 그만큼 심적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았겠는가 라고 묻자 “그렇다. 그래서 이처럼 책의 형태로 내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늦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단지 이제야 그처럼 털어놓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일 뿐이다. 지금에야 내가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인정한다. 정말 그가 나치 친위대에 소속해 있으면서 어떤 범죄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을까? 그가 지금까지 행했던 친 나치 인사들의 과거행적에 대한 비난을 이번 그의 고백과 관련하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만일 그가 일찍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면 그래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그의 지금까지 쓴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도 다시 내려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질문은 질문을 낳는다. 희생자의 세대 등을 떠밀려서건 혹은 자발적으로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털어놓은 인물이 귄터 그라스 한 사람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03년 ‘국제 독문학자 인명사전’을 출판하면서 발터 옌스를 비롯한 독일 내의 명망있는 여러 학자들이 과거 나치당원이었음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일이라거나, 기억이 없다고 부인하였지만, 나치당원이 되기 위해서 적어도 한번은 지구당 사무실에 출두해야 했을 것이므로, 본인이 전혀 모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그는 자신의 뒤늦은 고백을 인정하면서 더 일찍 고백했어야 했다고 토로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에 대한 지금의 사회의 반응은 과장된 것이고, 사회가 자신을 괴물로 취급하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나의 어떤 의지없이 그 일들에 연루되었을 뿐이다.”라며. 60년이 지난 오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잘못을 열 일곱살 짜리 소년의 철없던 행동으로 떠넘기기란 어렵지 않다. 이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나치의 과거와 완전히 청산한 세대이기는 하더라도, 정작 자기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데 있어서는 무력하고, 불분명 했던 세대였다. 분명하게 자신들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자인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 세대는 스스로를 가해자가 아니라 시대가 낳은 희생자로, 또 불공정한 여론의 희생자로 느끼고 있다. 남에게는 도덕적 판결을 내렸지만, 정작 그 자신을 시대정신에 복속시킬 용기나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번 귄터 그라스의 경우가 나치시대의 행적을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이는 거의 마지막 사건이 될 듯 싶다. 이들마저 곧 세상을 떠나면 누가 열 일곱살짜리 소년의 어릴 적 어리석음에 대하여 관심을 갖겠는가? 우리에게도 고백은 있는가? 사람의 기억은 부정확해서 진실과 허구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그라스는 양파껍질 벗겨내듯 기억을 한켜한켜 벗겨내며 실상을 드러내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껍질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아 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혹은 그 경계를 밝히고자 헛되이 껍질들을 벗겨내며,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우리는 정화된다. 일흔을 앞둔 한 노작가의 뒤늦은 고백 <양파껍질을 벗기며>를 보는 독일사회의 눈길은 복잡하다. 늦었지만 용감한 행위로 칭송하는 이들부터 더 이상 국민작가로서의 명성을 인정치 않으려는 입장, 이중적 도덕관을 가진 위선자, 탁월한 자서전 판매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까지 다양한 시각이 혼재해 있다. 책과 인터뷰를 통하여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호소하지만, 왜 60년간 침묵을 지켜왔는가의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어쩌면 그 부분은 이해시킬 수도, 이해 될 수도 없는 부분일지 모른다. 세상에는 말로도, 글로도, 행동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고 다 이해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라도 진실을 털어놓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삶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일생의 거짓말이라면. 그라스는 6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독재자에게 충성했던 자신의 상처를 일반에게 공개할 수 있었다. 기억은 고통스럽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오랜 침묵으로 귀가 멍멍해지기까지’ 그 고통을 피해왔던 것이며, 이제 그는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피고석에 앉힘으로써 평생을 짓눌러왔던 기억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한 것이다.
이진일/튀빙겐대 역사학 박사, 성균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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