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런던에서 출판된 존 버년의 <천로역정>. 두 권짜리고 양피지에다 목판그림을 곁들여 호화롭게 꾸몄다. 모든 <천로역정>을 모으는 데 320만엔이 들었다.
인사동에 책과 그림 동시 전시 미술관
고서수집가 여승구씨 일흔인생 털어넣어
“책은 미술·공예기술 총망라한 종합예술”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특이한 책과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색 갤러리가 생겼다. 화봉갤러리다. 백상빌딩 지하 모란갤러리 자리다. 미술품 전시장 둘, 책 전시장 하나. 미술품 전시장은 여느 갤러리와 다름없는데 책 전시장이 독특하다. 가로 106㎝ 세로 152㎝ 크기에다 무게가 50㎏인 세상에서 가장 큰 <부탄>(116쪽, 프랜들리 플랜트, 미국, 2004)에다가 가로 1㎜ 세로 1㎜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 <올드 킹 콜>(12쪽, 글래티퍼 프레스, 스코틀랜드, 1985) 등 수많은 좁쌀책이 펼쳐져 있다. 주인은 고서수집가 여승구(73)씨. 갤러리에 책 전시관이 붙은 형식이지만 그의 직함은 거꾸로 화봉문고 대표가 우선이다. 여기에 화봉책박물관 관장에다 갤러리 관장 직함이 덧붙었다. 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70대 노인이 웬 난데없는 갤러리인가?
“그러잖아도 통인화랑 김완규 사장이 그 나이에 무슨 화랑이냐, 참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힌 지 그는 허허 웃었다. 그는 이미 시행착오를 겪었다. 모란갤러리로 전시를 예약한 화가, 조각가들이 항의를 해 온 것. 조각으로 유명한 모란미술관에서 하는 모란갤러리라는 이름값이 전시장을 택한 요건 중 하나였는데, 이름없는 화봉갤러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란갤러리 이름을 다시 붙이고 내년부터 화봉갤러리로 바꾸기로 했다.
“책은 학술, 미술, 공예기술이 포함된 종합예술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책박물관, 고서점, 인터넷 경매에다 갤러리를 합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합니다.”
1963년 사업을 시작해 외국 학술잡지와 책 수입판매를 해온 그는 2003년부터는 고서 판매로 전업해 자신의 호를 따서 화봉문고를 만들었다. 1982년부터 모은 고서가 10만여 점에 각종 자료가 즐비하다. 2004년 10월에는 화봉책박물관을 열었다. 하지만 인터넷 판매는 부진해 화봉문고는 개점휴업 상태이고 책박물관 역시 2년 남짓 존재하다가 창고와 사이버공간으로 사라졌다. 결국 박물관을 닫았는데, 최근 건물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인사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림에 문외한 아니냐는 물음에 “그동안 공들여 수집한 책들이 고활자본, 문학(고전문학, 신문학), 개화기 교과서, 고지도, 고판화 등 다섯 가지 주제”라면서 “아름다운 활자체와 독특한 삽화 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장정 등은 미술과 무관치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요, 한국의 옛 책은 컬러인쇄가 없어요. 불경의 <변상도>가 흑백이고, 조선시대 <오륜행실도>도 흑백 목판화란 말입니다.” 그는 외국 고서는 아름다운 컬러그림이 많아 비싸게 거래되는 데 비해 한국 고서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중국 또는 일본책으로 오해를 받았던 기억이 많다. 그래서다. 1983년께 일본 오사카역 앞 지하상가 고서점에서 두권짜리 <텬로역뎡>을 보고 환장했던 것은. 아름다운 한글체에다 기산 김준근의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다. 96만엔을 주고 밀수 혐의를 써가면서 사들였다. 그는 <텬로역뎡>과 함께 단원 김홍도의 삽화가 든 정리자본 <오륜행실도>, 역시 단원 그림이 든 목판본 <불셜대보부모은듕경>(1795, 화산 용주사 간행)을 스스로 ‘한국의 3대 미서’라고 이름 붙였다.
“그림에 눈이 뜨일 때까지는 대관을 위주로 할 생각입니다.” 화봉갤러리 이름을 알릴 기획전은 내년부터 열 계획이다. 요즘 미술 전문가들을 만나 개인교습을 받느라 밥값이 쏠쏠하게 나간다고 한다.
그는 대관이 잘되는 기간에는 별 관심이 없고 1~2월, 7~8월 비수기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개관전을 생각하는 내년 초도 책박물관 전시를 하고 싶지만 그래도 갤러리라고 열었는데 처음부터 책으로 도배하기는 그렇고 해서 7~8월쯤 전관에 책을 풀어놓을 생각이오.” 그럼 그렇지! 그림을 보면서도 그의 귀는 사직동 창고에 쌓아둔 책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 무엇보다 신문로 골방에서 쪼그린 채 숨죽여 울었던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책은 미술·공예기술 총망라한 종합예술”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특이한 책과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색 갤러리가 생겼다. 화봉갤러리다. 백상빌딩 지하 모란갤러리 자리다. 미술품 전시장 둘, 책 전시장 하나. 미술품 전시장은 여느 갤러리와 다름없는데 책 전시장이 독특하다. 가로 106㎝ 세로 152㎝ 크기에다 무게가 50㎏인 세상에서 가장 큰 <부탄>(116쪽, 프랜들리 플랜트, 미국, 2004)에다가 가로 1㎜ 세로 1㎜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 <올드 킹 콜>(12쪽, 글래티퍼 프레스, 스코틀랜드, 1985) 등 수많은 좁쌀책이 펼쳐져 있다. 주인은 고서수집가 여승구(73)씨. 갤러리에 책 전시관이 붙은 형식이지만 그의 직함은 거꾸로 화봉문고 대표가 우선이다. 여기에 화봉책박물관 관장에다 갤러리 관장 직함이 덧붙었다. 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70대 노인이 웬 난데없는 갤러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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