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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인간과 역사 꿰뚫어보는 옥중서신들

등록 2009-09-04 19:17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내 인생 최초로 청탁을 받은 원고는 ‘반성문’이었다. 고2 때였던가. 나는 ‘밀알’이라는 이름의 독서반 활동을 했는데, 독서반에서 독서를 했다는 이유로 몇 차례 학생부를 들락거린 일이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교실에 남아서 나름 진지한 표정들을 하고서 <무진기행>이며 <한씨 연대기> 같은 단편을 읽고 토론하고 있으면 당직 선생님이 늘 ‘적발’했다.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불려가 ‘일벌백계’ 운운하는 훈담을 들어야 했다. 수업 중에는 당연히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빈 교실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시책 때문에 독서반이 독서모임을 하다가 반성문을 쓰는 일은 구조적 모순의 비일비재한 폐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가지 일이 겹쳐 정학 처분까지 예고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일단 ‘반성문’부터 써야 했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누런 갱지 한 장을 하사하였는데, 그 안에 ‘반성의 염’을 다 기록하기는 어려워서 거듭 몇 장을 더 얻어다가 쓰고 또 썼다. 그때처럼 문필의 힘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기억이 별로 없다. 부족한 재주로 어쩌다 문필업에 종사하고는 있지만, 오호라 일필휘지! 그 말의 진경을 그때처럼 절실히 맛본 기억이 달리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갱지를 채워나갔다. 그런데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학교가 승인한 동아리의 목적에 부합하는 ‘독서’ 활동이었다는 점, 그날의 토론 작품이 현대문학사의 고전이라는 점, 그것을 읽고 토론할 만한 장소로는 길음동 분식집이나 돈암동 제과점보다 학교 교실이 너무나 편안하고 정당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작품을 읽으면서 주고받은 내용들을 일렬횡대로 써나가다 보니 어느덧 열 장을 넘어 스무 장을 지향하였다. 글은 막힘이 없었고 논거는 흡사 고딕 성당의 벽돌처럼 어느 하나 제외할 수 없는 견고한 스타일을 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 퇴근을 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온 학생주임 선생님은 “뭘 이렇게 길게 썼어, 누굴 놀려? 인마.” 하면서 단 한 장도 읽지 않고 휴지통에 버렸다. 나는 정학 처분을 받았다. 나와 제도교육의 관계는 서서히 끊어지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건축 교양서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의 지은이 이용재는 모름지기 사람은 한 번쯤 ‘갔다 와야 한다’고 썼다. 조선 시대라면 유배를 살다 오고 근현대라면 감옥 한 번쯤은 갔다 와야 천하에 길이 남을 서책을 남긴다는 얘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하여 그의 생애가 드리운 긴 그림자를 더듬어 보면서 자연스레 <김대중 옥중서신>을 떠올렸고 그 책으로 인하여 오래전의 사소한 추억까지 되새겨보았다. 1980년대 중반에 이 뜨거운 서한집이 발간되어 열독한 바 있고 그로 인하여 훗날의 두서없는 독서 와중에 어딘가 ‘갔다 온’ 사람들의 책이라면 각별한 마음으로 들춰 보곤 했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 같은 현대의 고전은 물론이고 단테의 <신곡>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또 고독한 생활의 기록이자 뜨거운 사상의 발원처가 된 그람시의 <옥중수고>나 저 남쪽 바다 제주도 대정읍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10년 유배 생활을 견딘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 가운데의 서한문은, 왜 한 번쯤 ‘갔다 온’ 사람들의 글을 읽어야 하는가를 위엄 있게 증명한다.

그 사회의 일반 관계와 익숙한 생활 터전으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어딘가로 막막한 유형을 떠나거나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감옥행의 처분을 받게 되면 우선 비장하고 통렬한 인간적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런 감정의 격렬한 폭발을 견뎌내고 이윽고 그것을 다스리면서 비참한 역사의 지형지물 속에 속박된 자신을 냉엄하게 되돌아보는 과정이 그 많은 기록들에 담겨 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세상과의 악연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여 마침내 심원한 깊이의 통찰을 길어내는 글들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결실로 보인다.

터키의 소설가 아지즈 네신 역시 유배 생활을 했다. 20세기 중엽, 계엄령 치하의 터키는 우리의 기억과 흡사하게도 ‘무고한 사람들을 좌익 사회주의자로 몰아 아나톨리아 고원 곳곳으로’ 유배를 보내곤 했다. 터키 북서부의 고도 부르사가 네신의 유배지였다. 그곳의 삶을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로 남겼다. 이 책은 적지 않은 유배와 수형의 기록물 중에서도 상당히 유쾌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삶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블랙 유머가 콧등을 시큰거리게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외>와 함께 이 책을 읽었으면 싶다. 표면에는 낯선 나라의 낯선 체험이 적혀 있지만 그 문장 속에는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일부러 어딘가로 가볼 필요는 없지만, 역시 한 번쯤 ‘갔다 온’ 사람들의 이런 글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식견을 보여준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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