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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우상의 광기’ 재연 안되게 ‘리영희 정신’ 이어가야”

등록 2010-12-07 08:21수정 2018-05-09 18:51

리영희 선생 추모 특별대담 참석자들이 6일 오후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대담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사 부사장, 고은 시인, 백낙청 <창작과 비평> 편집인, 사회를 맡은 백영서 연세대 교수.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리영희 선생 추모 특별대담 참석자들이 6일 오후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대담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사 부사장, 고은 시인, 백낙청 <창작과 비평> 편집인, 사회를 맡은 백영서 연세대 교수.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리영희 선생 별세
고은·백낙청·임재경 ‘추모 대담’
백낙청 “천진난만…옳지않은 일 눈 안감아”
고은 “불행 찾아서 촛불 밝힌 의리의 사나이”
임재경 “주류와 거리두고 진실에 더 다가가”

5일 리영희 선생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한 켠에서, 고인과 남다른 인연을 쌓아왔던 백낙청 <창작과비평> 편집인, 고은 시인,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등 세 명의 원로 지식인들이 마주앉았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대담 자리다. 백영서 연세대 교수의 사회로, 이들은 고인과의 인연, 고인의 삶과 사상 등에 대해 아쉬움과 그리움을 담아 이야기를 펼쳐냈다.

백영서(이하 사회) 제 경우엔,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영등포 교도소에 있을 때 함께 있던 김지하 시인의 권유에 따라 출소 뒤 고인의 댁을 찾아갔던 것이 고인과의 첫 인연이었다. 개인적 인연을 말해달라.

임재경(이하 임) 1960년대 중반 <조선일보>에서 고인과 함께 근무했다. 당시 다른 기자들과 달리 특권의식도 없고, 시대의식과 현실감각이 뛰어났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적 없지만 후배로서 ‘저런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친해졌다. 당시 창간된 <창작과비평>(창비)에 대해 이야기하며 특별히 가까워지게 됐다.

백낙청(이하 백) <창비>가 창간된 1966년, 임재경 선생 소개로 고인을 처음 만났고 <창비>에 고인의 번역글을 싣기도 했다. 박사학위 때문에 미국에 다시 가 있는 동안 고인은 신문사에서 해직되고 글을 많이 써냈다. <창비>에도 ‘베트남전쟁1·2’를 실었고, ‘베트남전쟁3’은 내가 귀국한 뒤인 75년에 실었다. 그 때문에 판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서 개인적으로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됐다.

고은(이하 고) 1960년대 후반 기자와 문인이 서로 어울리는 경우가 많아, 서로 알아보고 눈인사를 나누는 처지였다. 70년대 들어 친구이자 선배, 교사 등으로 어우러져 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1983년인가, 술을 먹고 쓰러졌다가 깨어보니 하나는 형이 되고 하나는 동생이 됐다. 그 동안 형과 동생으로 지내오다가, 지금은 고인과 애도하는 사람으로 이렇게 앉아 있다.

사회 고인은 대학과 신문사에서 4번 해직당하고 5번이나 구속되는 등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오셨다. 고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시는지?

고인은 평안북도 산골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는 경성공고라는 실업학교를 나오고 해방 뒤 한국해양대학을 다녔다. 전통시대의 사대부, 명문대학, 일류대학 등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류’와 거리가 멀다. 기득권이 없는 것이다. 주류가 아닌 곳에서 출발했던 고인은 기자로서, 지식인으로서, 교수로서 다른 이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진실에 더 가깝게 접근했다.

책상·의자를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사격술도 아주 뛰어났다. 이는 시대의 초점을 확인하는 뛰어난 통찰력과 연결되지 않는가 여겨진다. 지식인이라는 것은 ‘아는 자’다. 아는 자는 본질적인 계급이 아니라, 모르는 자와 함께 동행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고 잘못 안 것은 고쳐주는 것은 아는 자의 사명이다. 그런 맥락에서 고인은 지행합일의 대표이며 실천적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손재주도 좋고 권총도 잘 쐈다. 같은 산악회에서 등산도 함께 했었는데, 산에 가면 아슬아슬한 곳에 가길 좋아하는 등 모험심도 강하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다. 이것은 그의 지적 탐구심하고도 연결된다. 또 천진난만하고 놀기도 좋아했다. 옛날 제기동에 살 때에는, 정초에 사람들이 고인의 집에 가서 노는 것을 좋아했고 고인 역시 잘 놀고 즐거워했다. 이런 성품에서 나온 바른 소리이기 때문에 고인의 말이 더 값지고 오래가지 않나 한다. 투사 체질이 아니지만, 옳지 못한 일 보면 눈 감지 못하고 입 닫지 못했다. 그런 진정성이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 아닌가 한다.

사회 고인의 생각 가운데 오늘날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일찍부터 허위와 상투적 관념을 깨뜨리는 발언을 하셨다. 특히 분단되어 있는 현실이 독재정권을 얼마나 뒷받침하고 있는가, 얼마나 독재의 구실로 작용하는가, 언론의 타락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 등에 대해 예민한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민족의 먼 미래를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지만, 당장 우리를 짓누르는 남쪽 사회 내부의 질곡이 분단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리영희 담론의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은 ‘자유와 책임’이다. 인간의 원점은 자유인데, 이것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심어줬다. 또 자유라는 것을 행사하는 결과로, 분명히 고귀한 대가로서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무거운 사명을 얘기했다. 특히 이상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자칫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고인의 경우 모든 이상의 출발은 철저한 현실에 있다고 했다. 사실에 기초해 사실을 열거하고 조직하고 확인해서 자기의 발을 놓는다는 것, 이게 리영희 사상의 원 풍경이다.

고인에 대해 르몽드 신문은 ‘메트르 드 팡세’라 했는데, ‘팡세’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곧 철저히 사실에 입각해서 보고, 두 번 세 번 생각하는 행위의 스승이라는 것. 고인의 사상은 “기성품은 싫다”는 것이다. 어떤 사상을 완성했다, 어떤 사상의 신봉자다 이런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지식인의 자세를 강조했다. 동구권 붕괴를 놓고 공부할 때 고인은 “사회주의 30%, 자유주의 70%는 가능하지 않을까” 말한 적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 등을 구분하려 드는 서양식 인식 체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자유와 책임을 중시한 고인은, 남북이 서로 자신의 체제를 고집해서는 전쟁 또는 계속된 분단으로 인한 혼란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상(像)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다만 체계적인 연구를 하신 분은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분석하기보단 ‘리영희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10대 후반에 6·25를 겪었는데, 70대 후반이 된 지금에도 아직 6·25가 진행되고 있다. 20세기는 극대화한 야만이 거듭되고 인류가 위기에 봉착했던 ‘야만의 세기’다. 리영희는 그 야만을 못 견딘 ‘20세기적 지식인’이다. 그런데 20세기의 정황이 21세기라고 해서 정리된 것이 아니라 확대·재생산될 여지가 많다. 이런 때야말로 고인의 사상과 공적은, 역사로서 벽화처럼 걸린 것이 아니라 우리들 하나하나 속에 재현되어야 한다.

사회 고인에 대해 짧게 정리하자면?

엄격한 사람, 강직하고 자기 희생을 감내한 사람 등의 이미지가 있는데, 사실 정감이 넘쳤던 분이다. 다정다감했던 인간 리영희도 공부할 점이 많다.

의리의 사나이다. 어떤 불행이 있어도 그 불행을 찾아서 그 앞에 작은 촛불이라도 하나 밝혔다. 어떤 때에는 아이 같은 나보다도 더 아이 같았던 천진투성이 사람이었다.

고인은 최근 시국에 대해서도 파시즘의 도래를 경고하고 구한말 합방 직전과 같다고 염려하는 등 서릿발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 대한 채찍질로 받아들이고, 그의 경고가 현실이 안되도록 해야 한다. 그를 대신 내세워 독한 소리를 하게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껴선 안된다. 그의 업적을 제대로 계승해야 한다.

사회 70~80년대 고인이 비판했던 ‘우상의 광기’ 시대가 다시 오고 있지 않나 한다. 고인이 강조했던,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무기’가 다시 활성화되길 바란다.

정리/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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