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길담서원에서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신년 특강에 참여한 회원들이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07년 인문학 서점으로 첫발
방문객 스스로 기획·참여한
공부 모임·문화강좌 등 풍성
방문객 스스로 기획·참여한
공부 모임·문화강좌 등 풍성
지난 14일 오후 5시께, 서울 종로구 통인동 골목에 있는 ‘길담서원’은 변신중이었다. 벽을 가득 메운 책꽂이들과 문 옆에 놓인 피아노, 한쪽 구석 ‘한뼘 전시공간’에 걸린 그림들은 그대로였지만, 한복판에 놓여 있던 키 낮은 책꽂이들은 모두 구석으로 옮겨져 가운데 공간을 넓게 열었다. 50개의 의자들이 빈 공간을 채웠다. 천장에 달린 빔프로젝터가 의자들이 쳐다보고 있는 앞쪽을 비췄다. 서점으로 보였던 곳이 순식간에 50명의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강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저녁 7시30분이 되자, 한국 근현대사를 재밌는 입담으로 풀어내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강연이 시작됐다. 초로의 아저씨부터 학생인 듯한 젊은 남녀 등 청중들의 진지한 열기는 바깥의 추운 겨울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담서원은 2월25일이면 세돌을 맞는다. 서원의 대표 격인 ‘길담서원지기’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는 “3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이 작은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7년 처음 이곳을 열 때, 그는 “책과 공간이 있으면 자연히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에서 일을 벌였다.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문화적인 행사도 벌이는 공간을 꿈꿨지만, 처음부터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기획해서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엄선한 인문학 책들을 들여와 비치해두고, 작은 공간이지만 여러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도록 안배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서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둘씩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재 길담서원에서는 ‘청소년 인문학 교실’,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 교실’, ‘프랑스 어문 공부모임’, 영어책 읽는 ‘콩글리시’ 모임 등 다양한 공부 모임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의 기획을 전담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다. “누군가 인터넷 카페든 어디에서든 필요성을 제기하면, 그 의견에 사람들이 동의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박 교수)는 것이다.
공부 모임뿐만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특별 강연, 전시회,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도 벌어진다. 회원들의 요구에 따라 새해를 맞아 열렸던 바이올린·첼로 연주자들의 ‘신년음악회’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박 교수는 이를 두고 “작은 공간의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길담서원이 다른 인문학 서점이나 문화공간들과 다른 부분은, “문턱이 낮은 것”이라고 한다. 기획하는 사람이 따로 없기 때문에, 누구든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시민단체를 비롯해 우리 사회 모든 ‘조직’의 문제점은 어디에나 소수의 터줏대감이 조직 운영을 은연중에 결정한다는 것”이라며 “참여자들이 최대한 자율적으로 만들어가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길담서원의 ‘작은 공간’은 그런 이상을 펼치기엔 최적의 규모인 셈이다. 서로 호칭을 버리고 별명으로만 부르는 길담서원의 문화는 이런 자율적 운영의 좋은 사례다.
박 교수는 “책이 있는 공간, 특히 장식용으로 전시된 책이 아니라 진짜 읽히는 책이 있는 공간은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자극한다”며 “사람들이 그 속에서 서로 소통하며 ‘우정’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이 꾸린 길담서원뿐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서점들 전체에 대한 격려사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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