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선미씨는 “어린이문학은 아이들만이 읽는 문학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즐기는 문학”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두권의 밀리언셀러 동화작가 황선미씨
인터뷰/허미경 방송미디어팀장 carmen@hani.co.kr
인터뷰/허미경 방송미디어팀장 carmen@hani.co.kr
글쓰기는 내 습관…작가로 돈 벌줄 몰랐다
학교도 못가게 하는 부모 아래 혹독한 가난
대학 가려고 가출…책이 우리가족 먹여살려 그의 입은 수다하지 않다. 목청도 높지 않다. 그런데 나직나직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돈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유년의 가난은 황선미 문학의 자양분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다가다 길에서 스친다면 천생 ‘수수한 동네 아줌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내 옷에 돈을 쓰기보다는 내 새끼 입에 밥 한 톨 더 넣겠다’고 말할 것만 같은. 그의 입에서는 이따금 ‘돈’, ‘돈을 번다’ 같은 말이 새어나왔는데, 어쩐 일인지 듣는 이의 귀에는 ‘돈’이라는 그 즉물적인 낱말은 ‘밥’이라는 인간 목숨의 밑둥치를 떠받치는 낱말로 들렸다. 돈을 밥으로 듣게 하는 묘한 힘. 아마도 자신의 핍진한 생의 맥락을 드러내면서 그 말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돈은 밥이었다. ‘나’와 ‘내 가족’은 그것이 있어야 밥을 먹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동화작가 황선미(49)씨를 ‘이 시대의 작가’라 부르는 데 군말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지난 5월 국내 동화작가론 처음으로 동시에 두 권의 밀리언셀러를 냈다. 2000년 펴낸 초등 고학년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과 1999년 내놓은 저학년 동화 <나쁜 어린이 표>(웅진주니어)가 각각 100만부 판매를 넘어섰다. 그러나 황선미 문학을 ‘동화작가’란 수식어로만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철학자 김용석씨가 상찬했던 대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이다. 우리의 암탉 ‘잎싹’이 한번이라도 알을 품어보겠다는 꿈을 이루려고 닭장을 탈출하여 마당으로, 다시 마당 밖으로 나아가는 ‘꿈과 자유를 향한 여정’은 한국 문학의 한 성취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광풍과 혹독한 가난 속에서 이를 앙다물고 ‘잡아먹히진 않겠다’고 다짐하는 강인한 여자아이 ‘연재’와 집이 없어 떠도는 가족의 초상을 담아낸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꺽다리집·2010·사계절)은 청소년소설이란 ‘표지’를 훌쩍 뛰어넘었다. ‘진실함’ 혹은 ‘진정성’은 황선미 문학의 밑동이다. 강인한 생명력, 검질긴 목숨의 의지 같은 말은 황선미 문학을 요약한다. 황씨를 지난 6월15일 충남 논산 상월면의 한 폐교 터에서 만났다. 본디 한천초등학교가 있던 그 터는 한 기업(KT&G)의 자본력으로 문화공간 ‘상상마당’으로 거듭났고, 그날은 마침 개관식이 열렸다. 그 행사에 초청된 작가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행했다. 그에게서 들은 인상적인 첫마디는 “저는요, 작가는 (저 말고) 딴 사람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어요”였다. -대학(서울예술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지 않은가요. 작가는 딴 사람들 몫인 줄 알았다는 말은 뜻밖입니다. “문창과 다닐 때도 친구들과 지내지도 않았고, 선후배도 안 만났어요. 신경숙 작가가 1년 선배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한참 뒤에야 알았지. 저에게 글을 쓰는 건 일상입니다. 쓰는 건 쓰는 것일 뿐. 어려서부터, 초등 6학년 때부터 글쓰기는 습관이었어요. 일도 아니죠. 글을 쓰는 게 좋고, 그래서 문창과를 갔어요. 저희 가족은 당시 경기도 평택에 살았어요. 학교도 못 가게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학교를 가려고 서울로 도망쳤어요. 글쓰기는 제게 내가 할 줄 아는 것, 그런 거였어요. 사실 경리로 취직을 한다거나 공장에서 일한다는 생각을 했지, 작가가 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 안했어요.” -왜 친구들도 선후배도 안 만나고 살았는지요?
“먹고사느라 바빠서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등록금도 해결해야 하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하니까. 당시 오빠가 하숙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는데, 부모님은 등록금 대느라 허덕이셨죠. 5남매였는데요. 부모님 생각엔 저라도 벌어서 보탰으면 했는데, 저는 왜 나를 희생시키려 하는지 싫었죠. 만만한 게 큰딸이잖아요. 가난한 집의 맏딸은…. 작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쓰는 건 쉬지 않았어요.” -학교를 정해진 기간보다 오래 다녔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전 졸업장이 없어요. 중학교는 안 다녔어요. 고교 졸업식장에도 안 갔어요. 대학 때는 그래도 갔네요. 너무 어렵게 졸업을 한데다 아마도 그게 공부의 끝이라고 생각해서. 초등학교 졸업식이랑 고교 졸업식을 안 간 건 친구들은 다들 진학하는데 저는 가지 못한다는 자괴감에서였죠. 대학 원서를 내러 갈 차비가 없었죠. 그래서 대학을 가려고 가출했어요. 1년 뒤 다시 시험을 봤죠. 첫해는 아버지한테 좀 얻고, 해마다 일부는 장학금으로, 일부는 내 힘으로 일을 해서 채웠지요. 내 힘으로 모두 다 내야 했으면 (졸업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가출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려주세요. “제 여동생이 고교 3학년 말에 조기 취업이 되었어요. 고향 평택에서 동생이 다닌 고등학교가 불교계 학교였는데, 서울 우이동에 있는 도선사가 그 학교의 가장 큰 재단이랄까 그랬나봐요. 동생이 도선사 종무소에 취직했고, 절내에 직원에게 숙소를 제공했는데, 숙식은 안 되고 방만 있는 거죠. 방이 생기니까 저는 평택 부모님을 떠나 가출을 했죠. 동생은 직원식당에 가서 먹고, 저는 태반을 굶었어요. 직원식당에 저까지 가서 먹을 순 없어요. 스무살 초입 아가씨가 그러지 못하죠. 동생은 저보다 더 어린데, 그런 부탁 못하죠.”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 표>가 동시에 100만부를 넘어섰는데요. “(두 작품이) 기특하고 감사하죠. 우리 식구들 먹여 살렸으니까요. 우리나라 현대 아동문학 역사 길지 않아요. 어린이문학은 스테디셀러가 많고, 시간싸움이었으니까, 아동문학 역사 비추어 보면 나올 때가 된 거죠.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이런 기록이 줄줄이 생겨날 거예요.” -특히 2000년대 초중반에 뛰어난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 표>도 그렇고요. “그 시기에 책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됐어요. 외국의 좋은 책들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고급스러워졌고요. 이에 자극 받으니까 작가군도 다양하게 형성됐죠. 세계적으로 어린이문학이 100~150년 역사인데, 우리는 이 10년 안팎에 그 작품들을 거의 다 접했어요.”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이 투영돼 있고, 더욱이 출간된 지도 10여년 됐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도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보편성과 공감이라 생각해요. 사람이 갖는 시간이라는 것, 어린 시절, 청소년기, 어른. 이 시간은 어느 시대에 살건 비슷하잖아요. 사람들의 특성과 관계 맺는 양상과 부모·자식 관계는 시대가 달라도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고, 시대가 달라져도 바뀌지 않는 지점, 공감이 되는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0년이 지났어도 공감을 얻고 있다고 봅니다. 먼 옛날 이야기로 읽힐 수 있잖아요? 그런데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엇, 엄마는 무엇, 이런 것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런 공감은 아이들한테만 해당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동화는 아이와 함께 어른들이 읽는 문학이라고 생각하고요.” -새삼스럽고도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왜 글을 쓰는지요? “저는 떠들고 말하고 신나게 놀기보다는 외톨이 기질이 많아요. 관찰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요. 즐기기보다, 즐거운 사람을 주변인으로서 관찰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관찰한 것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죠. 그러다 보니, 상상력이 생겼나봐요.(웃음)” 모방 가능성 막으려고 국내동화·소설 안 읽어
시대 넘은 보편성과 공감이 두 밀리언셀러의 힘
동화가 아이들만 즐기는 문학은 아니라 믿어 -다른 작가가 쓴 작품들도 읽는지요. “제가 모방을 잘해요. 흡수가 되게 빠른 거죠. 그래서 국내에서 남이 쓴 동화나 소설을 거의 안 봅니다. 워낙 ‘물들기’가 잘 되는 스타일이라. 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흉내낼까봐 걱정되어서요. 그런 것이 없어야 나답게 나오지 않을까. 외국 작품은 우리와 다른 문화권이라 뜻밖 정보들이 있어서 가끔 보지만요. 우리 픽션은 동시대에 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들어갈 우려가 있잖아요.” -최근에도 몇몇 표절 시비가 있었죠.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느끼는데요. 학생들이 가진 반짝이는 감수성이 있어요. 걔는 그거 끝까지 갖고 가지 못해. 감당할 줄을 몰라. 이게 내 거였으면 좋겠다 하는 유혹이 있어요. 그런데 학생 거잖아요. 못하죠. 그런 유혹까지 있는데, 완성된 작품의 유혹은 훨씬 크죠.” -열 손가락 중에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봅니다. 수십편의 작품들 중 유난히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겠지요? “<내 푸른 자전거>와 <꺽다리집>이에요. <내 푸른 자전거>는 첫 자식이죠. <꺽다리집>은 청소년소설이라서 아픈 손가락이죠. 두 작품의 공통점은 가족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하필이면, 꼭 집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내 푸른 자전거>는 첫 출판사에서 말도 않고 다른 데로 넘기는 바람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목도 바뀌는 소동을 겪었어요. 다시 첫 제목을 찾아서 책을 냈어요. 그러니까 미안한 거예요. 잘 자라지도 못하고 상처 많고. 걔가 꼭 그래요. <꺽다리집>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내 이야기를 했어요. 변주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죠.” -<마당을 나온 암탉>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은데요. “글쓰기의 행복함을 알려준 책입니다. 맘껏 썼어요. 그 글을 쓸 때 두 개의 마음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암투병을 할 때 썼는데요. 아버지에게 저는 사랑하는 딸이었나봐요. 전라도 광주에 살 때였는데, 아버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는데, 평택까지 한달음에 가지를 못했어요. 부모가 위독하다 해도 바로 가지지 않는 상황이 있었어요. 오리에 대한 생각, 닭에 대한 생각이 시차를 두고 왔는데, 두 정보가 부딪치면서 이야기들이 스스로 자라 머릿속에서 이야기 집을 짓는 느낌이었죠.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글을 쓰고 나면,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글을 쓰고 앉아 있구나 하는 저주스런 생각이 글 쓰는 내내 교차했죠. 중단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저 자신이 끔찍하더라고요. ‘진짜 너 징그럽다.’ 그런데 다 잊을 수 있는 거예요. 육친에 대한 걱정이나 다른 걱정이 깨끗하게 잊혀지는 거예요. 식구들이 알까봐 걱정됐을 정도로.” -그 작품에 아버지의 모습도 담겨 있는지요. “그 글을 쓸 당시 우리 집에 행운목이 피었거든요. 밤만 되면 향기가 나는 거예요. 대체 무슨 향기가 이렇게 좋은가, 밤에 불을 끄고 향기를 따라다녔더니 행운목인 거예요. 멋대가리 없는 이파리 사이에 하얀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벌어져서 향기가 나는 거예요. 꿀이 흘러내리는데 엄청 달아요. 아, 우리 집에 기적이 생기나 보다, 아버지가 살아나실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마당을 나온 암탉>이 잘되려고 그랬던 건가봐요. 아버지가 암이 온몸으로 전이되는 상황에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셨어요. ‘왜 하필 나야’ 하는 원망과 억울함으로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호랑이같이 무서우셨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이 끝부분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잎싹’에게서 떠나잖아요. 잎싹이 죽음을 선택한 겁니다. (호시탐탐 노리던) 족제비 때문에 코너에 몰린 것이 아니고요. 새끼들 먹잇감을 찾는 족제비에게 잎싹이 ‘나를 먹여서 니 아기들 배를 채워라’라고 했죠.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아버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기에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그 책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셨죠.” -요즘 국내 소설을 보면 서사가 너무 빈약하거나, 그 반대로 서사는 강한 듯 보이는데 인위적인 느낌을 주어서 읽고 나면 허무한 경우도 있는데요. <마당을 나온 암탉>과 <꺽다리 집>은 읽고 나면 가슴이 뻐근해집니다. “허구의 진실인데요. (작가가) 의도를 갖고 전체를 드러내려 하는 겁니다. 서사의 힘이 크면 몰입하게 됩니다. 서사의 힘은 인물들이 지닌 진정성입니다. 작가가 독자와 공감하는 방법은 딱 하나 진실밖에 없죠. 소설의 구조는 거푸집 같은 것.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가 가야 합니다.”
학교도 못가게 하는 부모 아래 혹독한 가난
대학 가려고 가출…책이 우리가족 먹여살려 그의 입은 수다하지 않다. 목청도 높지 않다. 그런데 나직나직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돈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유년의 가난은 황선미 문학의 자양분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다가다 길에서 스친다면 천생 ‘수수한 동네 아줌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내 옷에 돈을 쓰기보다는 내 새끼 입에 밥 한 톨 더 넣겠다’고 말할 것만 같은. 그의 입에서는 이따금 ‘돈’, ‘돈을 번다’ 같은 말이 새어나왔는데, 어쩐 일인지 듣는 이의 귀에는 ‘돈’이라는 그 즉물적인 낱말은 ‘밥’이라는 인간 목숨의 밑둥치를 떠받치는 낱말로 들렸다. 돈을 밥으로 듣게 하는 묘한 힘. 아마도 자신의 핍진한 생의 맥락을 드러내면서 그 말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돈은 밥이었다. ‘나’와 ‘내 가족’은 그것이 있어야 밥을 먹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동화작가 황선미(49)씨를 ‘이 시대의 작가’라 부르는 데 군말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지난 5월 국내 동화작가론 처음으로 동시에 두 권의 밀리언셀러를 냈다. 2000년 펴낸 초등 고학년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과 1999년 내놓은 저학년 동화 <나쁜 어린이 표>(웅진주니어)가 각각 100만부 판매를 넘어섰다. 그러나 황선미 문학을 ‘동화작가’란 수식어로만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철학자 김용석씨가 상찬했던 대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이다. 우리의 암탉 ‘잎싹’이 한번이라도 알을 품어보겠다는 꿈을 이루려고 닭장을 탈출하여 마당으로, 다시 마당 밖으로 나아가는 ‘꿈과 자유를 향한 여정’은 한국 문학의 한 성취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광풍과 혹독한 가난 속에서 이를 앙다물고 ‘잡아먹히진 않겠다’고 다짐하는 강인한 여자아이 ‘연재’와 집이 없어 떠도는 가족의 초상을 담아낸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꺽다리집·2010·사계절)은 청소년소설이란 ‘표지’를 훌쩍 뛰어넘었다. ‘진실함’ 혹은 ‘진정성’은 황선미 문학의 밑동이다. 강인한 생명력, 검질긴 목숨의 의지 같은 말은 황선미 문학을 요약한다. 황씨를 지난 6월15일 충남 논산 상월면의 한 폐교 터에서 만났다. 본디 한천초등학교가 있던 그 터는 한 기업(KT&G)의 자본력으로 문화공간 ‘상상마당’으로 거듭났고, 그날은 마침 개관식이 열렸다. 그 행사에 초청된 작가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행했다. 그에게서 들은 인상적인 첫마디는 “저는요, 작가는 (저 말고) 딴 사람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어요”였다. -대학(서울예술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지 않은가요. 작가는 딴 사람들 몫인 줄 알았다는 말은 뜻밖입니다. “문창과 다닐 때도 친구들과 지내지도 않았고, 선후배도 안 만났어요. 신경숙 작가가 1년 선배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한참 뒤에야 알았지. 저에게 글을 쓰는 건 일상입니다. 쓰는 건 쓰는 것일 뿐. 어려서부터, 초등 6학년 때부터 글쓰기는 습관이었어요. 일도 아니죠. 글을 쓰는 게 좋고, 그래서 문창과를 갔어요. 저희 가족은 당시 경기도 평택에 살았어요. 학교도 못 가게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학교를 가려고 서울로 도망쳤어요. 글쓰기는 제게 내가 할 줄 아는 것, 그런 거였어요. 사실 경리로 취직을 한다거나 공장에서 일한다는 생각을 했지, 작가가 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 안했어요.” -왜 친구들도 선후배도 안 만나고 살았는지요?
“먹고사느라 바빠서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등록금도 해결해야 하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하니까. 당시 오빠가 하숙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는데, 부모님은 등록금 대느라 허덕이셨죠. 5남매였는데요. 부모님 생각엔 저라도 벌어서 보탰으면 했는데, 저는 왜 나를 희생시키려 하는지 싫었죠. 만만한 게 큰딸이잖아요. 가난한 집의 맏딸은…. 작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쓰는 건 쉬지 않았어요.” -학교를 정해진 기간보다 오래 다녔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전 졸업장이 없어요. 중학교는 안 다녔어요. 고교 졸업식장에도 안 갔어요. 대학 때는 그래도 갔네요. 너무 어렵게 졸업을 한데다 아마도 그게 공부의 끝이라고 생각해서. 초등학교 졸업식이랑 고교 졸업식을 안 간 건 친구들은 다들 진학하는데 저는 가지 못한다는 자괴감에서였죠. 대학 원서를 내러 갈 차비가 없었죠. 그래서 대학을 가려고 가출했어요. 1년 뒤 다시 시험을 봤죠. 첫해는 아버지한테 좀 얻고, 해마다 일부는 장학금으로, 일부는 내 힘으로 일을 해서 채웠지요. 내 힘으로 모두 다 내야 했으면 (졸업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가출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려주세요. “제 여동생이 고교 3학년 말에 조기 취업이 되었어요. 고향 평택에서 동생이 다닌 고등학교가 불교계 학교였는데, 서울 우이동에 있는 도선사가 그 학교의 가장 큰 재단이랄까 그랬나봐요. 동생이 도선사 종무소에 취직했고, 절내에 직원에게 숙소를 제공했는데, 숙식은 안 되고 방만 있는 거죠. 방이 생기니까 저는 평택 부모님을 떠나 가출을 했죠. 동생은 직원식당에 가서 먹고, 저는 태반을 굶었어요. 직원식당에 저까지 가서 먹을 순 없어요. 스무살 초입 아가씨가 그러지 못하죠. 동생은 저보다 더 어린데, 그런 부탁 못하죠.”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 표>가 동시에 100만부를 넘어섰는데요. “(두 작품이) 기특하고 감사하죠. 우리 식구들 먹여 살렸으니까요. 우리나라 현대 아동문학 역사 길지 않아요. 어린이문학은 스테디셀러가 많고, 시간싸움이었으니까, 아동문학 역사 비추어 보면 나올 때가 된 거죠.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이런 기록이 줄줄이 생겨날 거예요.” -특히 2000년대 초중반에 뛰어난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 표>도 그렇고요. “그 시기에 책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됐어요. 외국의 좋은 책들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고급스러워졌고요. 이에 자극 받으니까 작가군도 다양하게 형성됐죠. 세계적으로 어린이문학이 100~150년 역사인데, 우리는 이 10년 안팎에 그 작품들을 거의 다 접했어요.”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이 투영돼 있고, 더욱이 출간된 지도 10여년 됐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도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보편성과 공감이라 생각해요. 사람이 갖는 시간이라는 것, 어린 시절, 청소년기, 어른. 이 시간은 어느 시대에 살건 비슷하잖아요. 사람들의 특성과 관계 맺는 양상과 부모·자식 관계는 시대가 달라도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고, 시대가 달라져도 바뀌지 않는 지점, 공감이 되는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0년이 지났어도 공감을 얻고 있다고 봅니다. 먼 옛날 이야기로 읽힐 수 있잖아요? 그런데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엇, 엄마는 무엇, 이런 것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런 공감은 아이들한테만 해당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동화는 아이와 함께 어른들이 읽는 문학이라고 생각하고요.” -새삼스럽고도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왜 글을 쓰는지요? “저는 떠들고 말하고 신나게 놀기보다는 외톨이 기질이 많아요. 관찰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요. 즐기기보다, 즐거운 사람을 주변인으로서 관찰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관찰한 것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죠. 그러다 보니, 상상력이 생겼나봐요.(웃음)” 모방 가능성 막으려고 국내동화·소설 안 읽어
시대 넘은 보편성과 공감이 두 밀리언셀러의 힘
동화가 아이들만 즐기는 문학은 아니라 믿어 -다른 작가가 쓴 작품들도 읽는지요. “제가 모방을 잘해요. 흡수가 되게 빠른 거죠. 그래서 국내에서 남이 쓴 동화나 소설을 거의 안 봅니다. 워낙 ‘물들기’가 잘 되는 스타일이라. 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흉내낼까봐 걱정되어서요. 그런 것이 없어야 나답게 나오지 않을까. 외국 작품은 우리와 다른 문화권이라 뜻밖 정보들이 있어서 가끔 보지만요. 우리 픽션은 동시대에 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들어갈 우려가 있잖아요.” -최근에도 몇몇 표절 시비가 있었죠.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느끼는데요. 학생들이 가진 반짝이는 감수성이 있어요. 걔는 그거 끝까지 갖고 가지 못해. 감당할 줄을 몰라. 이게 내 거였으면 좋겠다 하는 유혹이 있어요. 그런데 학생 거잖아요. 못하죠. 그런 유혹까지 있는데, 완성된 작품의 유혹은 훨씬 크죠.” -열 손가락 중에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봅니다. 수십편의 작품들 중 유난히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겠지요? “<내 푸른 자전거>와 <꺽다리집>이에요. <내 푸른 자전거>는 첫 자식이죠. <꺽다리집>은 청소년소설이라서 아픈 손가락이죠. 두 작품의 공통점은 가족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하필이면, 꼭 집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내 푸른 자전거>는 첫 출판사에서 말도 않고 다른 데로 넘기는 바람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목도 바뀌는 소동을 겪었어요. 다시 첫 제목을 찾아서 책을 냈어요. 그러니까 미안한 거예요. 잘 자라지도 못하고 상처 많고. 걔가 꼭 그래요. <꺽다리집>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내 이야기를 했어요. 변주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죠.” -<마당을 나온 암탉>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은데요. “글쓰기의 행복함을 알려준 책입니다. 맘껏 썼어요. 그 글을 쓸 때 두 개의 마음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암투병을 할 때 썼는데요. 아버지에게 저는 사랑하는 딸이었나봐요. 전라도 광주에 살 때였는데, 아버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는데, 평택까지 한달음에 가지를 못했어요. 부모가 위독하다 해도 바로 가지지 않는 상황이 있었어요. 오리에 대한 생각, 닭에 대한 생각이 시차를 두고 왔는데, 두 정보가 부딪치면서 이야기들이 스스로 자라 머릿속에서 이야기 집을 짓는 느낌이었죠.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글을 쓰고 나면,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글을 쓰고 앉아 있구나 하는 저주스런 생각이 글 쓰는 내내 교차했죠. 중단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저 자신이 끔찍하더라고요. ‘진짜 너 징그럽다.’ 그런데 다 잊을 수 있는 거예요. 육친에 대한 걱정이나 다른 걱정이 깨끗하게 잊혀지는 거예요. 식구들이 알까봐 걱정됐을 정도로.” -그 작품에 아버지의 모습도 담겨 있는지요. “그 글을 쓸 당시 우리 집에 행운목이 피었거든요. 밤만 되면 향기가 나는 거예요. 대체 무슨 향기가 이렇게 좋은가, 밤에 불을 끄고 향기를 따라다녔더니 행운목인 거예요. 멋대가리 없는 이파리 사이에 하얀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벌어져서 향기가 나는 거예요. 꿀이 흘러내리는데 엄청 달아요. 아, 우리 집에 기적이 생기나 보다, 아버지가 살아나실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마당을 나온 암탉>이 잘되려고 그랬던 건가봐요. 아버지가 암이 온몸으로 전이되는 상황에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셨어요. ‘왜 하필 나야’ 하는 원망과 억울함으로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호랑이같이 무서우셨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이 끝부분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잎싹’에게서 떠나잖아요. 잎싹이 죽음을 선택한 겁니다. (호시탐탐 노리던) 족제비 때문에 코너에 몰린 것이 아니고요. 새끼들 먹잇감을 찾는 족제비에게 잎싹이 ‘나를 먹여서 니 아기들 배를 채워라’라고 했죠.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아버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기에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그 책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셨죠.” -요즘 국내 소설을 보면 서사가 너무 빈약하거나, 그 반대로 서사는 강한 듯 보이는데 인위적인 느낌을 주어서 읽고 나면 허무한 경우도 있는데요. <마당을 나온 암탉>과 <꺽다리 집>은 읽고 나면 가슴이 뻐근해집니다. “허구의 진실인데요. (작가가) 의도를 갖고 전체를 드러내려 하는 겁니다. 서사의 힘이 크면 몰입하게 됩니다. 서사의 힘은 인물들이 지닌 진정성입니다. 작가가 독자와 공감하는 방법은 딱 하나 진실밖에 없죠. 소설의 구조는 거푸집 같은 것.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가 가야 합니다.”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