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전기 오역’ 계기
번역가 재량 놓고 논쟁 붙어
‘원문파’ 이덕하 ‘자유파’ 노승영
사이트에 번역문 ‘공개 비교’
번역가 재량 놓고 논쟁 붙어
‘원문파’ 이덕하 ‘자유파’ 노승영
사이트에 번역문 ‘공개 비교’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 한국어판에 대한 ‘오역 논란’이 불거지면서 번역가들이 인터넷에서 ‘번역 시합’을 벌이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번역가들이 각자의 번역을 공개 비교하는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다.
발단은 지난달 출간된 <스티브 잡스>에 대해 번역가 이덕하씨가 ‘오역 투성이’라고 지적(<한겨레> 10월28일치 10면)한 것이었다. 이씨는 “한국 번역계는 너무 한심해서 자정 노력으로 어림 없으며, 대규모 번역 비판 등 외부로부터의 강한 충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견 번역가 노승영씨가 이씨의 비판을 다시 비판하고 나섰다. 노씨는 “오역 지적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니면 말고’ 식 지적으로 출판사와 번역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오역 지적에 오류가 있어도 두루뭉술 넘어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논쟁은 과연 ‘좋은 번역’은 어떤 것이냐로 이어졌다. 이씨는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해아 한다는 직역 중심의 ‘원문파’인 반면, 노씨는 최대한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게 다듬어야 한다는 의역 중심의 ‘자유파’로 대립하게 됐다. 논란이 된 스티브 잡스 전기의 한 구절 “computer power to the people”의 경우, 이씨는 존 레논의 노래 ‘민중에게 권력을’(power to the people)을 연상시킬 수 있도록 ‘사람들을 위한 컴퓨터’가 아니라 ‘민중에게 컴퓨터 권력을’ 정도로 옮겨야한다고 봤다. 자유파 노씨는 그 정보를 한국 독자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는 번역자의 재량이며 오역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렇게 견해가 엇갈리자 지난 3일 노씨가 ‘번역 비교’를 제안했고 이씨가 동의해 ‘번역 배틀’이 성사됐다. 두 사람은 12일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제임스 웨슬리 롤스 지음) 1장을 각자 번역해 ‘번역소비자연대’(cafe.naver.com/bunsoyun) 사이트에 공개했다. 이후 누리꾼들은 수백여개의 글과 댓글을 통해 갑론을박을 이어가고 있다. 쉽게 읽히는 노씨의 번역에 대해서는 “주요 정보가 완곡한 표현으로 번역되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술술 읽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등의 비판이, 우리말로 부드럽게 옮겨지지 않은 이씨의 번역에는 “정보만 있을 뿐 정서가 없다” “읽기 불편하다” 등의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단지 ‘누가 더 옳다’는 논쟁보다는 세세한 단어 풀이 방법부터 번역가의 품성과 열정까지 깊이 있고 다양한 논의들이 꼬리를 물고 펼쳐지고 있다. 이씨는 “번역가의 실력 평가보다는 ‘번역가의 재량에 대한 논쟁’이란 맥락과 취지를 고려해달라”며 “잡음은 있겠지만 이런 논쟁과 번역 비교가 한국 번역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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