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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수상한 이불과 삼켜버린 눈물 - 감을 쌓아 올리듯 블루스를 쌓다

등록 2016-01-29 20:28수정 2016-01-31 11:08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수상한 이불 작사·작곡: 씨 없는 수박 김대중

수상한 이불을 덮어본 적 있나요
낯설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나요
불 꺼진 새벽 쓸쓸한 모텔방에서
서러운 눈물에 잠을 깬 적 있나요
뜨거운 눈물을 삼켜는 보았나요
차거운 새벽 쓸쓸한 모텔방에서
다정한 여인을 안아본 적 있나요
그 예쁜 여인을 왜 떠나보냈나요
불 꺼진 새벽 쓸쓸한 모텔방에서
싸구려 비누로 얼굴을 씻었나요
맛없는 주스를 가방에 챙겼나요
차거운 새벽 쓸쓸한 모텔방에서
차거운 새벽 쓸쓸한 모텔방에서

젊은 블루스 뮤지션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이하 김대중)은 고명딸이 아버지 제사상에 감을 쌓아 올리듯 블루스를 쌓는다. 블루스를 쌓는 사람이 있고 블루스를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 앞쪽은 블루스의 형식미를 강조하고 뒤쪽은 블루스의 즉흥성을 강조한다. 이를 테면 블루스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 로버트 존슨은 블루스를 쌓는 쪽에 가깝고, 록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는 블루스를 풀어내는 쪽에 가깝다.

김대중은 일상에서 채집한 한의 스냅들을 면도날 같은 감각으로 편집한다. 그런 다음 정교하게 쌓아 올려 빈틈없는 애환의 탑을 만든다. ‘수상한 이불’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이다. ‘수상한 이불’과 ‘낯설은 베개’가 덩그러니 있는 모텔방은 한국 가요사가 발견한 가장 쓸쓸한 공간 설정일 것이다. 김대중은 안감과 속감과 원단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몸 위를 기어가는 꿈의 장면을 종종 선사하는, 흐린 형광들 불빛과 찰떡궁합인 ‘수상한 이불’을 우리 마음의 방 안에 툭 던져 놓는다. 그리고 은근슬쩍, ‘~나요’라는 감성적인 의문형으로 듣는 이를 끌어들인다.

노래는 많은 경우 그 안에 이미 화자와 청자를 품고 있다. 주고받는다. 특히 블루스는 이른바 ‘call and response’, 즉 ‘메기고 받는’ 형식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화자의 다성성이 노래를 노래답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시는 때로 주체의 긴 진술이 되기도 하지만, 노래는 그렇지 않다.

노래가 시작되면서 복수화된 다성화음적 ‘나’를 향한, 김대중 특유의 위트있는 탐문이 이어진다. 노래의 각 절은 두 줄의 의문문과 장소를 표시하는 부사구 한 줄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두 줄은 화자의 행동을, 뒤의 한 줄은 배경을 표시한다. 이 구조는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하게 지켜진다. 1절에서는 이불을 덮고 얼굴을 묻는다. 잠, 망각, 나아가 죽음이다. 2절에서는 ‘깨고’, ‘삼킨다’. 불현듯 돌아온 의식이다. 화자의 잠을 깨운 건 눈물이다. 3절에서 눈물의 정체가 밝혀진다. 이별이다.

이것이 김대중이 감을 쌓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차마 말을 못하고 얼굴을 묻는다. 그다음에는 눈물을 보여주고, 그러고 나서야 이야기의 껍질 속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망각, 그다음에는 의식, 그러고 나서 의식 속의 사연이다. 김대중은 이런 구조를 만들기 위해 보통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다. 참다가 참다가, 블루스 가수는 3절에서야 비로소 꺼내기 힘들었던 사연의 일부를 고백한다. 다정한 여인이 있었고, 여인은 떠나갔다. ‘나’는 예쁜 여인을 떠나보냈다. ‘나’는 곱씹고 있다. 나는 놈놈놈. 미련한 놈, 나쁜 놈, 불쌍한 놈. 그 모두인 나는 쓸쓸한 모텔방에 혼자 있다. 그것도 새벽에.

그리고 긴 한숨 같은 하모니카 간주가 나온다. 매우 효과적으로 설정된 간주다. 때로 간주는 노랫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장면이 전환된다. 사연이 깊으면 말이 줄어드는 법. 누구도 죽기 직전에는 한숨으로 모든 감회를 대신한다. 결정적인 이야기가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할 때, 노래는 그 말을 오히려 막는다. 쌍욕을 토해내려는 언어를 향해 악기들은 말한다. 그만하면 됐다고.

하모니카의 간주가 비루한 일상을 사는 우리 모두의 착잡한 마음을 달래준 이후에 장면은 바뀐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화자는 수상한 이불을 빠져나온다. 뒤에 남겨진, 구겨진 그 이불이 수상한 이유는,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의 바보 같은 눈물과 서러운 체액들이 묻었다가 스미고, 빨래로 널리고, 허옇게 마르고, 하여 지긋지긋, 착색되었기 때문이다. 모텔방은 잔인하다. 따뜻한 가정집이라면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그 사연 많은 이불을 계속 빨아 다시 쓴다. 일상은 점점 찌들어 급기야 존재는 너덜너덜한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들은 ‘맛없는 주스를 가방에 챙’긴다. 우리 모두는 때로 그렇게 구차하게 챙기며 산다.

‘수상한 이불’이라는 12마디의 마이너 블루스는 그 장면에서 단편영화처럼 끝난다. 잡범들이 등장하는 장르물, 고해성사와 내면일기, 다큐멘터리가 겹쳐 있다. 김대중은 참, 사는 거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노래에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담백한 충청도 김치 맛이라고나 할까. 노랫말을 텍스트로 적어놓고 들여다보니 그 모양이 꼭 시조 같다. 사실 블루스와 시조는 공통점이 많다. 블루스는 12마디 3줄 구성(AAB 구조),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구성이다. 사실 12마디 블루스나 초중종장의 시조는 기승전결에서 결을 빼먹은 미완성의 구조, 불안정한 구조다. 왜 그랬을까? 결론은 내서 뭐하니.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미국 남부지역을 떠돌던 흑인들이 형식화시킨 블루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하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다. 남의 애인과 자고 뒷문으로 나오는 남자, 살인 누명을 쓴 사람, 발에 쇠고랑을 차고 줄줄이 엮여서 도로를 닦고 있는 장기수, 앞 못 보는 장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12마디의 단순하고 강렬한 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만 블루스의 역사를 수놓고 있다.

근대 이후 가장 파란만장한 문화적, 역사적 여행을 한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다. 맹수와 놀고 기름진 곡식을 쟁여놓던 신화의 주인공들이 하루아침에 잔혹한 백인 지배자의 노예가 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팔려 갔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몸’ 자체가 식민화됐다. 백인들은 자기들의 예술 역사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피식민 민중의 고혈을 짜내어 만든 물감과 캔버스와 상아로 만든 건반이 있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블루스는 수백년에 걸친 흑인들의 디아스포라를 비가시적인 소프트웨어로 응축시킨 문화적 핵이다. 20세기의 음악사는 블루스가 전세계로 유포되는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은 일제 말기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블루스 ‘다방의 푸른 꿈’(김해송 작곡, 이난영 노래) 이래로 시작된 한국의 블루스 수용사에서 독보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흑인들의 ‘1인칭’을 우리 언어의 ‘1인칭’과 오버랩, 또는 몽타주시켰다는 점이다. 김대중의 마이너 블루스는 블루스이면서 시조, 뽕짝이고 타령이다. 노래 하나로 역사 속 여러 구슬들이 꿰어져 있다. 블루스 같은 보편적인 장르에서 이만한 신선함을 성취한 뮤지션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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