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시인 김행숙
천사에게
천국에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천국에도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가,
이 세계에도 있는 것이 천국에도 있으면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아, 달빛은 메아리 같아. 꼬리가 흐려지고…… 떨리는…… 빛과 메아리. 달빛은 비밀을 감싸기에 좋다고 생각하다가,
달빛은 비밀을 풀어헤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달빛은 스르르 무릎을 꿇기에 좋은 빛, 달빛은 사랑하기에 좋은 빛, 달빛은 죽기에도 좋은 빛,
오늘밤은 천사의 날개가 젖기에도 좋은 빛으로 온 세상이 넘쳐서, 이 세계 바깥은 없는 것 같구나. 우리 도시의 지하에는 커브를 그리며 돌아다니는 열차가 있고, 열차에는 긴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긴 의자에 앉으면 천국의 사람들처럼 죽은 듯이 흰자위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속에서도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의 눈송이 같은 귀에다 뜨듯한 입김을 불며 속삭여주었다.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나는 물었고, 그리고 오랫동안 대답을 기다렸다.
-시집 <에코의 초상> 수록-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귀를 틀어막는 천사를 언젠가 나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천사의 귀가 사람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이 아니라 꺼내놓지 않은 마음의 소리까지 전부 듣는다면, 그 귓가는 흡사 전쟁터 같을 것이다. 행복한 인간보다는 불행과 절망에 빠진 인간 곁을 더 오래 맴도는 것이 천사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이라면, 그의 표정에 멜랑콜리의 정조가 깊이 배어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가슴을 치며 허물어지듯 외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던 천사를 언젠가 나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베를린의 어느 고층 건물 옥상 난간에서 천사는 자살을 하려는 한 청년의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고 있었지만, 청년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훌쩍 날아가는 새처럼 삶으로부터 가볍게 뛰어내려버렸다. 그 가벼움은 날개를 가진 천사마저 돌덩이처럼 무겁게 주저앉힐 만큼 그렇게 무섭도록 가벼운 것이었다. 이 장면을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詩)>(1987)가 담았다.
천사의 손은 청년의 절망을 한 줌도 덜어낼 수 없었다. 천사의 품 속에서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우리들의 천사는 그가 사랑한 사람들처럼 아프고 슬프고 피로하고 그리고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우울한 천사는 천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불행한 이웃들 주변을 내내 떠돌고 있다. 천국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그의 영혼이 이 세계의 슬픔에 젖어 너무 무거워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때리고 죽이는 이 잔혹한 세상으로부터 가볍게 발을 떼고 날아오를 수 없게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천사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언제나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세계가 흘리는 피와 눈물이었을 것이다.
헬조선의 천사들이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귀를 틀어막을 때, 멜랑콜리한 검은 외투 속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허물어져 내릴 때, 그 일그러진 천사에게 나는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래도, 이래도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그리고 오랫동안 대답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천사의 이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들끓고 있는지 귀 기울이고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천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몸소 겪어내야 할 것이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로운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든 지속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다림의 어떤 자세를 만들어갈 것이다.
질문을 던진 그 순간부터 나는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썼던 비유를 빌리자면, 질문은 우물 안에 던져진 돌 하나였고, 그 우물은 내 영혼이었을 테니까. 우물에 던져진 돌 하나가 문득 우물의 깊이를 일깨우고 사방으로 번지는 메아리와 메아리와 메아리를 낳는다. “물음 안에 담은 모든 영혼의 힘이 대답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내 마음에서 시들어버린 천사가 깨진 무릎을 반짝이며 타박타박 걸어나올 때까지, 나는 들끓는 침묵과 불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것이 어둠이고, 이것이 우리의 밤이라면, 밤에 사랑하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천사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밤에 천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밤에 당신은 보이지 않는 천사를 닮고, 천사는 보이지 않는 당신을 닮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많이 가진 것이 밤이다.”(졸시, <밤에>)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 천사들, 우리의 희미한 사랑, 우리의 아스라한 희망을 믿고 꿈꿀 수 있는 시간이 밤이다. 별처럼 뜨거운 밤이다. 그것이 밤의 가능성이고 밤의 힘이다.
밤의 달빛처럼 천사가 당신의 지친 어깨에 투명한 손을 얹는다. 그 어느 날에는 당신의 어깨에서 천사의 날개가 돋아났을 것이다. 문득 당신의 마음이 가장 맑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맑아져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그런 놀라운 순간이 누군가의 옷깃처럼 당신을 스쳐가고 있었을 것이다.
김행숙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마주침의 발명> <에로스와 아우라> 등이 있다.
이별의 능력, 분열의 능력
김행숙은, 줄곧 부정적인 상실로 이해해온 일이 실은 우리가 지닌 특별한 ‘능력’임을 알려 주었다. 그녀가 쓴 시의 제목이자 2007년에 출간한 시집 제목이기도 한 ‘이별의 능력’이 그 예다. 이별은 사람과의 헤어짐만이 아닌, 매 순간 우리를 스쳐가는 상황과 사물과 감각 등과의 각기 일회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의미한다. 김행숙은 이별을 인간이 경험하는 불가피한 사건을 넘어, 인간이 수행하는 주체적인 능력으로 격상시켰다. 그녀는 이별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 수행한다. 이행하고 집행한다고 해도 좋겠다.
삶은 각기 단 한 번뿐인 이별들의 불연속적인 과정이다. 김행숙의 시에서 ‘나’는 방금 전의 나 자신(들)과도 줄기차게 이별한다. ‘나’는 너, 그것, 나 자신, 이름붙일 수 없는 익명의 무엇들과 끊임없이 이별하고, 이별한 만큼 더 많은 나로 분열된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나’인지 알 수 없으며, 구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이별의 능력은 분열의 능력이다. 이별하는-분열하는 인간은 겹겹이 늘어나는 안과 밖, 왼쪽과 오른쪽을 갖는다. 여기저기 흩어져 타자와 뒤섞인다. 1인칭 서정적 자아의 특권을 해제하는 인칭과 언술의 다중 화법은 2000년대 시의 새로운 흐름이지만, 이 흐름을 이끈 김행숙은 ‘나’의 분열이 타자를 향한 공감과 사랑의 기원임을 보여준 점에서 각별했다. 즉 이별의 능력은 분열의 능력이고, 분열의 능력은 공감과 사랑의 능력이다. 마침, 심리학에서 공감은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생각하는 이심적인(double-minded) 집중으로 정의된다.
이별-분열-공감-사랑의 언술이 논리적이거나 평면적일 리 없다. 김행숙 시의 글자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로 쓰이지만, 단어와 문장들은 다각도로 번지고 튀어 나가면서 입체적인 의미와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에서 김행숙은 고통받는 인간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않는 천사와 조우한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한 모든 이별의 증인인 천사의 곁에서 다시 “깊고 부서지기 쉬운” 사랑을 시작한다.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인간의 시간’ 전문).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