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최종천
노동의 현악사중주
베토벤이 현악사중주에서
불협화음을 마음껏 끌어들여 즐긴 것은
일종의 놀이이다.
노동을 놀이로 만드는 일은 간단하다.
실수를 하면 되는 것이다.
치수도 각도 다 틀리게
시간과 공간과 희롱하면서
잘 못 자른 것은 다시 붙일 수 있고
붙인 것은 다시 자를 수가 있으니
실수는 성공보다 즐기기에 좋은 것이다.
실패란 옳게 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예술의 완성은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에 몰두하는 이유이다.
노동은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즐길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견습공한테 시켜 놓고 보면 좋다.
뭐든 실수와 실패를 통하여 배운다.
안다는 것은 이렇게 재미없고 위험하다.
사실, 예술이란 형상을 다루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는 시행착오이다.
예술은 허구이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를 즐길 수 있으나
노동은 질료인 실체를 다루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가 용납되지 못한다.
인간이 노동에 몰두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시인동네> 2015년 겨울호 수록-
불협화음을 마음껏 끌어들여 즐긴 것은
일종의 놀이이다.
노동을 놀이로 만드는 일은 간단하다.
실수를 하면 되는 것이다.
치수도 각도 다 틀리게
시간과 공간과 희롱하면서
잘 못 자른 것은 다시 붙일 수 있고
붙인 것은 다시 자를 수가 있으니
실수는 성공보다 즐기기에 좋은 것이다.
실패란 옳게 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예술의 완성은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에 몰두하는 이유이다.
노동은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즐길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견습공한테 시켜 놓고 보면 좋다.
뭐든 실수와 실패를 통하여 배운다.
안다는 것은 이렇게 재미없고 위험하다.
사실, 예술이란 형상을 다루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는 시행착오이다.
예술은 허구이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를 즐길 수 있으나
노동은 질료인 실체를 다루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가 용납되지 못한다.
인간이 노동에 몰두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시인동네> 2015년 겨울호 수록-
최종천
노동하지 않기 “나는 곧장 말하겠다/ 富의 내용은 문명이나 예술/ 예술이 만들어 내는 상품이나 문화 따위가 아니다/ 富는 손상되지 않은 자연과/ 소외되지 않는 노동이다.”(‘富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란 어쩌면 하지 않아도 되는/ 잔업 시간인지도 모른다.”(‘잔업 시간’) 에둘러 말하기는 시의 미덕과 의무처럼 알려져 있지만, 어떤 시들은 곧장 말한다. 에두르는 말의 미학과 다의성보다, 직설의 충격과 메시지가 필요할 경우다. 지난 시대에 한국 사회를 뒤흔든 노동시의 상당수는 직설했다. 시가,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머리와 가슴에,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사람과 삶을 잡아먹는 현실에, 직진하기를 바랐다. ‘문화의 시대’라는 허울을 쓴 헬조선의 현실은 ‘신(新)노예사회’라는 체감을 실감으로 바꾸고 있다. 상위 1%의 ‘노동 초월자’를 제외한 모두가 점점 더 많은 노동과 실업, 삶의 비용에 고통받고 있다. 이 괴물성의 노동의 시대에, 노동시는 정작 낡고 왜소한 것이 되었다. 노동시의 쇠락은 노동에 대한 진언(眞言)마저 공허한 울림으로 만든 ‘자본의 승리’를 반증한다. 그 승리의 비밀의 하나는, “날개와는 달리 욕망은 착륙하지 않는다는 것”(‘날개’)에 있다. 허공을 떠도는 욕망은 노동의 비참에 눈감고, 노동의 무의미에 침묵한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되는 잔업”까지 맹렬히 하게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에 편승한다. ‘당신’과 ‘나’는 헬조선의 고통스러운, 분노하는, 그러나 순응하고 있는 노동자-노예인 것이다. 이 구조적이며 내발(內發)적인 비극을 끝내는 최후의 방법을, 최종천은 곧장 말한다. 노동하지 않기. 이세 노예를 생산하지 않기. “소외되지 않는 노동”이 불가능하다면, 노동과 노동자 자체를 폐기하자는 이 극단적인 주장은, 최근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정치적 견해이기도 하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는 노동, 자신의 삶과 행복을 결정하는 노동자, 놀이와 노동을 아우르는 문화예술은 지금, 극단의 부정성을 통해(서만) 꿈꿀 수 있는 것으로 화하고 있다. 비보(悲報)가 오보(誤報)일 확률은, 얼마인가.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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