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김기택
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집 <태아의 잠>수록-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집 <태아의 잠>수록-
김기택
치밀할수록 눈물겹고 냉혹할수록 따뜻한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弱者)라면, 약자란 자신을 지나,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 다다르는 존재다.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과 세상에 다다를 줄 아는 존재가 약자라니. 그렇다면 시는, 그리고 시인은 약자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른 것/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는, 무엇보다 자기 점검에 철저해야 한다. 상대를 ‘대상화’하고 ‘주체화’하는 오류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오류는 시의 내부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김기택이 투철하고 투명하게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그 오류의 이름은 ‘의인화(擬人化) 혹은 인간화’와, ‘정신화(情神化) 혹은 마음화’다. 김기택은 인간의 위상을 강자에서 약자로, 유일한 주체에서 수많은 주체의 하나로 바로잡는다. 틈, 졸음, 먼지, 거품, 파리, 먹자골목의 돼지갈비, 껌, 침출수 등 비(非)인간이 시의 주인공이 되고, 노인, 사무원, 울음 많은 여자, 만원 전동차 안의 승객 등에 대한 “비인간적인 시선과 태도”가 시적 주체의 시선이 된다. 더불어 김기택은 인간의 중심을 정신과 마음에서 ‘육체’로 하향(?) 조정함으로써 그간의 인식의 불균형을 바로잡는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 내 詩는 그런 육체에 의하여 또는 그런 육체를 위하여 씌어졌다.” 정신과 대등한 육체가, 육체의 일종인 마음이 말하기 시작한다. 시가 마음과 영혼의 형이상학적 산물이라는 오래된 편견이 수정된다. 김기택은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육체의 우열관계를 단지 뒤집는 것이 아니라, 권위의 구도 자체를 해체한다. 이 해체로부터 김기택만의 화법이, 시의 스타일이 탄생한다. 시에서조차도 억압당했던 주름과 분비물의 육체가, 그런 육체를 가진 마음이 인간과 비인간을 넘나들며 토해내는 말들은 치밀할수록 눈물겹고, 냉혹할수록 따뜻하다. 더 많이 사랑하는 약자의 자리에서 시는 이렇게 그전까지의 자신을 지나고, 인간화된 인간을 넘어선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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