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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고통과 치욕의 즐거움

등록 2016-05-06 20:00수정 2016-05-07 09:35

김기택,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김기택

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집 <태아의 잠>수록-

등단작인 이 시는 젊은 시절의 정신적 심리적인 이력이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어서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청소년기에 찍힌 낙인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치부가 노출되었을 때 느껴지는 이상한 쾌감도 있다. 어차피 나와야만 했던,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였다. 이 작품을 거치지 않고는 그 뒤에서 나오고 싶어 꿈틀거리는 후속 작품들이 내 안에서 마음껏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27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이 시를 쓰던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초고를 쓸 때 불구자이며 걸인인 노인을 연민이 아니라 증오의 눈길로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생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끝자락에 서 있는, 출구가 막혀 도망갈 곳조차 없는 그 나약한 노인을, 나의 펜은 가혹하게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가 되었으며, 그의 몸은 이미 숨은 곳으로 더 깊이 숨어들어가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만 겨우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계속 써도 되는 것인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나의 펜은 계속 나아갔다. 왜 이렇게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시선과 태도가 내 안에서 나왔을까. 하지만 이렇게밖에는 달리 쓸 수 없는, 이렇게 쓰라고 명령하는 어떤 힘이 내 손을 틀어쥐고 펜을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았다.

시를 쓰고 나서 한참 지나서야 그 꼽추 노인에게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내면의 불구성이 꼽추라는 육체를 입고 제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나는 나약하고 겁 많고 왜소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던 20대의 내가 싫었던 게 틀림없다. 꽤나 증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한순간도 편히 숨 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불구의 육체는 숨으려고 애쓰다가 가장 난처한 모습으로 나에게 들켜버린 치욕스런 나였다. 그것은 토사물처럼 아무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제 힘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기형적인 힘이었다. 그러했기에 그 힘은 연민이 아니라 증오의 시선으로 노인을 보게 하였고, 출구를 차단시켜 놓고 더 숨 막히고 더 어둡고 더 헤어날 수 없는 구석으로 그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때 막무가내로 힘만 세고, 가야 할 방향은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 힘에서 이상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알. 등뼈가 변형된 알. 일생을 억압해온, 철근처럼 느껴져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등뼈를 일시에 부서뜨릴 것 같은 태동. 밖으로 나갈 곳이 막혔을 때 내 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구의 몸으로 꿈꾸는 일이었다. 다 무너져버리면 시원할 것 같은 심정, 아무것에도 기대고 싶지 않은 자리에서 솟아오르는 알 수 없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 꿈, 그 순수한 욕망은 아주 연약한 알로 철근 같은 등뼈를 부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 시는 삶과 정신을 억누르는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을 불구의 이미지에다 몰아놓고, 일생을 억눌려온 등뼈가 최대치로 끓어올라 폭발하도록 고안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불구의 치욕이 임계점에 이르는 지점에서 자폭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는 사건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의 공간으로 들어서면 고통이나 치욕, 절망 따위가 어느 순간 아이들처럼 놀고 싶어하는 심리를 경험하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때 비장하고 심각했던 일들은 터무니없이 낙관적이 되고 천진스러워지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느닷없이 즐거움으로 희열로 바뀌는 것이다. 내가 왜 소리치고 울부짖었는지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노는 데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시는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마술, 슬픈 즐거움, 괴로운 즐거움, 수치스러운 즐거움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이상한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적 이미지에는 삶이 주는 여러 가지 병이나 상처 같은 재료를 가지고 환희로 만드는 연금술과 놀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김기택
김기택
김기택

*1957년 안양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을 출간했다.



치밀할수록 눈물겹고 냉혹할수록 따뜻한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弱者)라면, 약자란 자신을 지나,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 다다르는 존재다.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과 세상에 다다를 줄 아는 존재가 약자라니. 그렇다면 시는, 그리고 시인은 약자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른 것/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는, 무엇보다 자기 점검에 철저해야 한다. 상대를 ‘대상화’하고 ‘주체화’하는 오류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오류는 시의 내부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김기택이 투철하고 투명하게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그 오류의 이름은 ‘의인화(擬人化) 혹은 인간화’와, ‘정신화(情神化) 혹은 마음화’다.

김기택은 인간의 위상을 강자에서 약자로, 유일한 주체에서 수많은 주체의 하나로 바로잡는다. 틈, 졸음, 먼지, 거품, 파리, 먹자골목의 돼지갈비, 껌, 침출수 등 비(非)인간이 시의 주인공이 되고, 노인, 사무원, 울음 많은 여자, 만원 전동차 안의 승객 등에 대한 “비인간적인 시선과 태도”가 시적 주체의 시선이 된다. 더불어 김기택은 인간의 중심을 정신과 마음에서 ‘육체’로 하향(?) 조정함으로써 그간의 인식의 불균형을 바로잡는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 내 詩는 그런 육체에 의하여 또는 그런 육체를 위하여 씌어졌다.” 정신과 대등한 육체가, 육체의 일종인 마음이 말하기 시작한다. 시가 마음과 영혼의 형이상학적 산물이라는 오래된 편견이 수정된다.

김기택은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육체의 우열관계를 단지 뒤집는 것이 아니라, 권위의 구도 자체를 해체한다. 이 해체로부터 김기택만의 화법이, 시의 스타일이 탄생한다. 시에서조차도 억압당했던 주름과 분비물의 육체가, 그런 육체를 가진 마음이 인간과 비인간을 넘나들며 토해내는 말들은 치밀할수록 눈물겹고, 냉혹할수록 따뜻하다. 더 많이 사랑하는 약자의 자리에서 시는 이렇게 그전까지의 자신을 지나고, 인간화된 인간을 넘어선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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