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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죽음 곁

등록 2016-05-20 21:38수정 2016-05-21 11:33

이영광,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이영광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

주말 등산객들을 피해 공비처럼 없는 길로 나아가다가
삼부능선 경사면에 표고마냥 돋은 움막 앞에서
썩어가는 그것을 만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도
놀라지 않았다 몸이 있어 있을 수 있는 광경이었기에
이미 짐승들이 뜯고 찢어 너덜너덜한 그것 곁에 찌그러진 양푼 곁에
불 꺼진 스탠드처럼 어둑어둑 소나무 그늘이 드리웠기에
나는 쭈그려 담배를 피우며 아, 여기는 저승 같네 하면서도
정시하진 못했다 아직 시체와 눈 맞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되었다 그것이 자기를 잊고 벌떡 일어나선 안 되었다
사실 파리는 왱왱거리고 구더기들은 들끓었다 구더기들은
다시 파리가 되어 피를 빨고 알을 슬어 헐렁한 음부나
가슴 밑에 또 구더기를 키우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저것은
죽은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그것이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나는 이해했다, 저 몸은 이 산의 압도적인 응달 안에서
개울물과 함께, 독경 같은 새소리와 함께 뒤척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검은 흙과 푸른 잎에 숨 쉬듯 젖고 있지 않은가
금방도 꺾였던 무릎을 슬며시 폈다, 이것은 산 것인가?
나는 답하지 못했다 고개가 또 혼자 갸우뚱했다
생이 한 번 죽음이 한 번 담겼다 떠난 빈 그릇으로서
이것의 야윈 몸은 지금 축축하고 혈색도 체취도 극악하지만
죽은 그는 다만 꿋꿋이 죽어가고 있다 무언가가 아직
건드리고 있다, 검정파리와 구더기와 송장벌레와 더불어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은 잠투정을 하는 것 같다 귀가 떨어졌다
당신의 뺨은 문드러졌다 내장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당신의 한쪽 팔은 저만치 묵은 낙엽 위를 혼자 기어가고 있다
그것이 닿는 곳까지가 몸일 것이다 끊겼다 이어지는
새 울음과 근육질의 바람이 이룩하는 응달까지가 당신의
사후일 것이다 고통과 인연과 불멸의 혼을 폐기하고 순결히
몸은 몸만으로 꿈틀댄다 제가 몸임을 기억하기 위해 부릅뜨고
구멍이 되어가는 두 눈을, 눈물의 벌레들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것은 끝내 벌떡 일어나지 않았지만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다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
나는 북받치는 인간으로 돌아와 왈칵 왈칵 토했다 아카시아
숲길 하나가 뿌옇게 터져 있다 자연이 유령의 손으로 염하는
자연을 또 한 번 본다 이 봄은 울음 잦고 길할 것이다

-<나무는 간다> 수록-

겁이 많아진 건지 없어진 건지, 근자에 죽음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걸 알면 살 것 같지 않을까 해서인 듯하다. 죽음을 아는 방법은 죽어보는 것이겠지만, 그러질 못해 다른 이의 죽음을 애써 기억해내려 한다. 죽은 몸, 정확히는 죽어서 버려진 몸에 대한 집착이 계기가 되어 이 처량한 걸 쓰게 되었다.

처음 본 건 여덟 살 적, 고향의 강에서였다. 그것은 물가의 웅덩이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젖먹이인 듯한 조그만 덩어리가 모래에 살짝 묻힌 채 웅크려 있었다. 작은 머리에 더 작은 몸. 보드라운 옆구리 살이 닳아서 하늘거렸고, 햇빛을 머금은 물결이 희미한 분홍빛 형체를 어르듯 흔들고 있었다. 기겁을 했으면서도, 나는 왠지 따가운 볕 아래서 그것을 오래 내려다보았던 것 같다.

다음은 군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죽은 이등병의 시신을 지킬 때였다. 자살 동기가 밝혀지지 않아 유족 측과 부대 측이 실랑이하는 동안, 죽은 몸은 버려져 보급대 안치실에 두 주가 되도록 누워 있었다. 경계근무를 나가면 시트를 걷고, 폭발로 떨어져나간 부위들을 주워 모아 얼기설기 꿰매어 놓은 그것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부패가 시작되자 시취가 뿜어져 나왔다. 왜…? 물어도 말이 없었다.

스무 해가 지나 그것을 또 보았다. 산에서였다. 시는 그 만남을 재구성한 것이고, 그것의 상태는 본문에 그려진 대로이다. 자연사의 진행은 대강 이러하다…. 혈압이 떨어지고 호흡이 멎어가며 지각에 마비가 온다. 심장박동이 약해지고 감각이 사라지며 청각만이 희미하게 남은 의식 혼탁이 찾아온다. 졸음과 환각 가운데 혼수상태에 이르며, 문득 뇌파가 사라진다. 동공이 멎고 오줌이 흐른다. 그리고….

심근에서 시작하여 몸통을 거쳐 사지까지 사후 경직이 덮여간다. 피는 자줏빛 반점으로 굳고 며칠이면 부패가 시작된다. 그것은 내부에서 녹는 한편 세균과 벌레들에 의해 밖으로부터 허물어져 내린다. 사체는 곧 거인처럼 부풀어 오른다. 썩어가는 몸은 동물들의 밥이다. 독수리, 까마귀, 들개는 물론 파리, 개미, 송장벌레 따위에 이르기까지. 짐승들이 뜯어먹고 벌레들이 빨아먹는 여러 달 동안, 그것은 느리게 백골이 되어간다.

죽은 몸은 죽음인가? 죽음이라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았다면 그런 말을 안 할 테니까. 하물며 귀신조차도 제가 죽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런 말은 더러 들은 듯도 하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건 죽음의 소리였다. 나 지금 죽었다, 나는 죽어 있다니까. 이런 말. 그런데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나는 이것을 오래 들여다본다. 이것은 조금씩 꿈지럭거리며, 자연의 문지기거나 안내인인 듯 어디론가 기어 사라져가는 것이다. 영혼은 관찰되지 않는다. 이것은 말이 없다.

내겐 꿈이 둘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의 교과서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좋은 건 교과서와 경전에 다 들어 있다. 현실이 교과서와 다르다는 걸 알지만 같으리라 믿는 척하는 병든 나를, 믿는 나로 바꾸고 싶다. 더 좋은 것은 좋은 것 너머에나 있거나 없거나 할 것이다. 나는 졸업이 싫다. 둘째는, 이기지 않는 것이다. 이겨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간은 자꾸 승리에 진다. 생은 애초에 져 있는 것 같은데.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거나 술에 취해 흐릿해졌을 때, 별안간 포기가 즐거울 때, 나는 내가 그 꿈에 조금 다가간다는 생각이 들고, 불현듯 죽음 곁에 누워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 시를 쓰는 일은 내게, 얼마간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이다. 죽음은 수많은 말과 수많은 자세를 일러준다. 침묵을 사랑하는 말과 멈춤을 사랑하는 자세들. 시는 그렇게, 왔다가 간다.

죽은 몸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가 내게서 불러낸 그 말을 듣고 그 자세를 지켜보는 어떤 존재가 아니었을까. 들은 것이든 읽은 것이든 잊히지 않는 말이란 것도 어느 만큼은 이 시선의 자극에 의해 점화된 것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죽은 몸은 나의 오래된 교과서가 아닌가. 이렇게 하여 나는 인간에 대해서도 쓰고, 인간이었던 것에 대해서도 쓰고, 인간이라는 정체불명에 대해서도 쓰게 된다.

이영광
이영광
이영광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가 있다.



사는 일로만은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삶도, 죽음도 완전하게 누리지 못한 채 인간은 죽는다.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삶이며 죽음일 것이다. 살아서도 다 살아낼 수 없는 것, 죽어서도 다 죽어지지 않는 것들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이, 근원적인 무력감 속에 패배를 자인하는 대략의 스토리. “원, 삶도 죽음도 아닌 그걸 뭐 어쩌겠습니까”(‘개구리 지옥’). “생은 애초에, 져 있는 것 같은데”.

삶과 죽음, 삶과 삶, 죽음과 죽음이 벌이는 대결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손실로 끝난다. 이영광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죽음은 “죽음이 안 되면 죽음을 여의어야 했는데/ 삶을 버리”고, “삶은 또 부스스 깨어/ 쓰리당한 밤길의 여자처럼 멀거니/ 제 끝없는 사랑을 쳐다본다”(‘하지만’). 삶과 죽음이 맞붙는 세 구도의 대결에서 소진되고 훼손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언제나 삶이다. 삶도 죽음도, 끝내 삶에 상처 입히며 승리하거나 패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삶도 죽음도 아닌” 어떤 혼돈이며, 인간은 “인간이라는 정체불명” 앞에 속수무책인 자기 몰이해의 존재다. 이 혼돈과 불능을 살아내기 위해 이영광은 “산 낙지만큼 미치”는 광기와, “죽음에 뚫리며, 가”는 부분적인 죽음과(‘나무는 간다’), “기도할 수 없는 기도”의 텅 빈 말들에 의지해 시를 쓴다(‘기도’). 이영광에게 시 쓰기는 사는 일로만은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자신을 애도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미치는 일이며, 죽는 일이고, 불가능에 투신하는 일이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기를/ 살려주는 일”(‘깔깔대는 혼’). 삶과 죽음과 인간이라는 모호한 질문에 대한 이영광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무런 약속이나 기대 없이, 패배와 죽음을 통과하고자 하는 시인이 믿는 구석은 오직 하나다.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고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는 확신. 삶과 죽음을 설명하는 논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본성에 몸을 맡기는 것. 때로,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하”면서(‘사랑의 발명’).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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