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이영광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
주말 등산객들을 피해 공비처럼 없는 길로 나아가다가
삼부능선 경사면에 표고마냥 돋은 움막 앞에서
썩어가는 그것을 만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도
놀라지 않았다 몸이 있어 있을 수 있는 광경이었기에
이미 짐승들이 뜯고 찢어 너덜너덜한 그것 곁에 찌그러진 양푼 곁에
불 꺼진 스탠드처럼 어둑어둑 소나무 그늘이 드리웠기에
나는 쭈그려 담배를 피우며 아, 여기는 저승 같네 하면서도
정시하진 못했다 아직 시체와 눈 맞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되었다 그것이 자기를 잊고 벌떡 일어나선 안 되었다
사실 파리는 왱왱거리고 구더기들은 들끓었다 구더기들은
다시 파리가 되어 피를 빨고 알을 슬어 헐렁한 음부나
가슴 밑에 또 구더기를 키우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저것은
죽은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그것이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나는 이해했다, 저 몸은 이 산의 압도적인 응달 안에서
개울물과 함께, 독경 같은 새소리와 함께 뒤척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검은 흙과 푸른 잎에 숨 쉬듯 젖고 있지 않은가
금방도 꺾였던 무릎을 슬며시 폈다, 이것은 산 것인가?
나는 답하지 못했다 고개가 또 혼자 갸우뚱했다
생이 한 번 죽음이 한 번 담겼다 떠난 빈 그릇으로서
이것의 야윈 몸은 지금 축축하고 혈색도 체취도 극악하지만
죽은 그는 다만 꿋꿋이 죽어가고 있다 무언가가 아직
건드리고 있다, 검정파리와 구더기와 송장벌레와 더불어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은 잠투정을 하는 것 같다 귀가 떨어졌다
당신의 뺨은 문드러졌다 내장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당신의 한쪽 팔은 저만치 묵은 낙엽 위를 혼자 기어가고 있다
그것이 닿는 곳까지가 몸일 것이다 끊겼다 이어지는
새 울음과 근육질의 바람이 이룩하는 응달까지가 당신의
사후일 것이다 고통과 인연과 불멸의 혼을 폐기하고 순결히
몸은 몸만으로 꿈틀댄다 제가 몸임을 기억하기 위해 부릅뜨고
구멍이 되어가는 두 눈을, 눈물의 벌레들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것은 끝내 벌떡 일어나지 않았지만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다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
나는 북받치는 인간으로 돌아와 왈칵 왈칵 토했다 아카시아
숲길 하나가 뿌옇게 터져 있다 자연이 유령의 손으로 염하는
자연을 또 한 번 본다 이 봄은 울음 잦고 길할 것이다 -<나무는 간다> 수록-
삼부능선 경사면에 표고마냥 돋은 움막 앞에서
썩어가는 그것을 만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도
놀라지 않았다 몸이 있어 있을 수 있는 광경이었기에
이미 짐승들이 뜯고 찢어 너덜너덜한 그것 곁에 찌그러진 양푼 곁에
불 꺼진 스탠드처럼 어둑어둑 소나무 그늘이 드리웠기에
나는 쭈그려 담배를 피우며 아, 여기는 저승 같네 하면서도
정시하진 못했다 아직 시체와 눈 맞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되었다 그것이 자기를 잊고 벌떡 일어나선 안 되었다
사실 파리는 왱왱거리고 구더기들은 들끓었다 구더기들은
다시 파리가 되어 피를 빨고 알을 슬어 헐렁한 음부나
가슴 밑에 또 구더기를 키우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저것은
죽은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그것이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나는 이해했다, 저 몸은 이 산의 압도적인 응달 안에서
개울물과 함께, 독경 같은 새소리와 함께 뒤척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검은 흙과 푸른 잎에 숨 쉬듯 젖고 있지 않은가
금방도 꺾였던 무릎을 슬며시 폈다, 이것은 산 것인가?
나는 답하지 못했다 고개가 또 혼자 갸우뚱했다
생이 한 번 죽음이 한 번 담겼다 떠난 빈 그릇으로서
이것의 야윈 몸은 지금 축축하고 혈색도 체취도 극악하지만
죽은 그는 다만 꿋꿋이 죽어가고 있다 무언가가 아직
건드리고 있다, 검정파리와 구더기와 송장벌레와 더불어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은 잠투정을 하는 것 같다 귀가 떨어졌다
당신의 뺨은 문드러졌다 내장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당신의 한쪽 팔은 저만치 묵은 낙엽 위를 혼자 기어가고 있다
그것이 닿는 곳까지가 몸일 것이다 끊겼다 이어지는
새 울음과 근육질의 바람이 이룩하는 응달까지가 당신의
사후일 것이다 고통과 인연과 불멸의 혼을 폐기하고 순결히
몸은 몸만으로 꿈틀댄다 제가 몸임을 기억하기 위해 부릅뜨고
구멍이 되어가는 두 눈을, 눈물의 벌레들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것은 끝내 벌떡 일어나지 않았지만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다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
나는 북받치는 인간으로 돌아와 왈칵 왈칵 토했다 아카시아
숲길 하나가 뿌옇게 터져 있다 자연이 유령의 손으로 염하는
자연을 또 한 번 본다 이 봄은 울음 잦고 길할 것이다 -<나무는 간다> 수록-
이영광
사는 일로만은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삶도, 죽음도 완전하게 누리지 못한 채 인간은 죽는다.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삶이며 죽음일 것이다. 살아서도 다 살아낼 수 없는 것, 죽어서도 다 죽어지지 않는 것들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이, 근원적인 무력감 속에 패배를 자인하는 대략의 스토리. “원, 삶도 죽음도 아닌 그걸 뭐 어쩌겠습니까”(‘개구리 지옥’). “생은 애초에, 져 있는 것 같은데”. 삶과 죽음, 삶과 삶, 죽음과 죽음이 벌이는 대결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손실로 끝난다. 이영광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죽음은 “죽음이 안 되면 죽음을 여의어야 했는데/ 삶을 버리”고, “삶은 또 부스스 깨어/ 쓰리당한 밤길의 여자처럼 멀거니/ 제 끝없는 사랑을 쳐다본다”(‘하지만’). 삶과 죽음이 맞붙는 세 구도의 대결에서 소진되고 훼손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언제나 삶이다. 삶도 죽음도, 끝내 삶에 상처 입히며 승리하거나 패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삶도 죽음도 아닌” 어떤 혼돈이며, 인간은 “인간이라는 정체불명” 앞에 속수무책인 자기 몰이해의 존재다. 이 혼돈과 불능을 살아내기 위해 이영광은 “산 낙지만큼 미치”는 광기와, “죽음에 뚫리며, 가”는 부분적인 죽음과(‘나무는 간다’), “기도할 수 없는 기도”의 텅 빈 말들에 의지해 시를 쓴다(‘기도’). 이영광에게 시 쓰기는 사는 일로만은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자신을 애도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미치는 일이며, 죽는 일이고, 불가능에 투신하는 일이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기를/ 살려주는 일”(‘깔깔대는 혼’). 삶과 죽음과 인간이라는 모호한 질문에 대한 이영광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무런 약속이나 기대 없이, 패배와 죽음을 통과하고자 하는 시인이 믿는 구석은 오직 하나다.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고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는 확신. 삶과 죽음을 설명하는 논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본성에 몸을 맡기는 것. 때로,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하”면서(‘사랑의 발명’).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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